퇴근하고 육아출근
지혜는 39살이다.
35세에 이혼을 하고 3살 아들을 혼자 키우고 있다.
10년 전부터 글로벌 회사는 어때? 연봉 높아? 등을 타진했던 그녀는 2년 전 내가 있는 회사에 입사했다.
미국 스폰서와 프로젝트 팀미팅을 해야 하는데
영어 울렁증이 심한 지혜는 영어만 하려고 하면 특유의 '그 뭐꼬?" 하며 부산사투리가 먼저 튀어나오곤 했다.
그녀는 모든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를 영어로 번역해 달달 외웠다.
이번 미팅땐 꼭 이거 따질 거예요.
이건 한국에서 절대 할 수 없는 일 아닌가요?
우리 수준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미팅 있던 그날 밤 지혜는 전화해서는 깔깔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서 오케이만 했는데
안된다고 했어야 할 일도 오케이가 돼버려서
따지기는커녕 없던 일도 만들고 말았단다.
천지창조도 아니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게 생겼다고 했다.
이렇게 일을 만들어하게 된 지혜는 야근에 야근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울며 전화했다.
미쳤나 봐요.
퇴근하는 것도 잊고 어린이집에서 아들 하원하는 것도 잊어버렸어. 몇 통이나 전화가 온 줄도 모르고 내가 미쳤지. 난 일도 못하고 엄마도 자격 없는 것 같아요.
한참을 자책하다 통곡했다.
퇴근하고 오면 육아출근인데 도와줄 사람은 없고
애만 키우자니 돈이 필요하고
뭐 이래?
며칠 뒤 지혜는
참다 참다 보스에게 눌린 감정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프로젝트 클라이언트 너무 숨이 막힌다고.
당장 빼주지 않으면 그만두겠다고.
보스는 그럼 그만두라고 했다.
골드미스인 보스는 늘 말했다.
육아휴직은 미혼인 사람들에겐 불공평하다고
그냥 남편이 버는 걸로 애 키우고 살면 안 되느냐고.
같은 여자들이 더 냉정하다.
...
대한민국은 모순 덩어리다.
제도는 있지만
인식의 변화는 너무 더디다.
출산을 장려하지만
육아에 대한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대가는 가혹한 경력 단절이다.
지혜를 설득했다.
네 생각이 짧았다고 해
다시 해보겠다고 해.
자존심이 강한 지혜는
결국 퇴사를 하게 되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지혜는 이직을 하고자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경기가 너무 안 좋아 번번이 실패했다.
얼마 전 들려온 지혜의 소식.
언니~나 국가 기관에 입사했어. 1년 계약직이야.
여기서 글로벌 과제 담당해.
근데 있잖아 영어가 안 들려서
그때처럼 안 해도 될 일을 쳐내지 못하고 다 하고 있다.
주말엔 아르바이트하고 평일에도 투잡 뛰어.
퇴근하면 육아 출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