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글로벌, 내 영어는 그냥 벌.

인글리쉬 vs 콩글리쉬

by 아궁이

보스는 나에게 업무 경험과 영역을 넓힐 기회를 주겠다며 회사 내 region level position 하나를 제안했다.

인도 사람이 매니저라서 그 사람과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했고,

나에 대한 소개를 해 두었으니 부담 없이 해보라는 말에 정말 편하게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야근의 연속이었지만,

뭔가 새로운 일을 할 기회가 왔다는 것만으로 설레기도 하고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 피곤하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확실히 느끼는 건, 나는 익숙함에 머무르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탐색하는 걸 더 즐기는 N 성향이라는 거다.

좋은 기회를 제안해 준 보스의 기대에도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결과를 얻으리.


드디어 그날이다. 오후 3시.

가장 구석진 회의실 한 곳을 예약하고 들어가 준비하였다.

간단한 경력위주의 자기소개는 필수적이었으니, 중요한 키워드를 메모하며 할 말을 정리했다.

인도 사람이면 아시아 국가니까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하지 않아도 서로 눈치껏 이해하겠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왜 position을 변경하려 하는지 묻겠지?

하다가 말문이 막히면 뭐라도 말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문장과 답할 말들을 써 보았다.

보스 선에서 이야기된 것이니 형식적인 인터뷰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최소한의 질문을 예상하며

주절주절 답변을 연습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꼭 잘 돼서 새로운 업무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간이 되어 화상미팅룸에 나 외에 2명이 입장했다.

그중에 여자는 자신을 내가 지원하는 포지션의 시니어라고 소개했고 필리핀 사람이라고 했다.

딱 봐도 인도사람으로 보이는 남자, 그가 보스가 말했던 인도 매니저였다.


인터뷰 진행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를 필리피노 시니어가 해 주었고 본격적으로 보스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와뚜유씽크디스뽀지숀이즈라이트뽀유?"

"............"

'와이? 와? 그다음을 못 알아듣겠다. 어? 발음이 너무 다른데? 이게 영어 맞나? 인도 사투리 아니야?'

순간 당황한 나는

" 아임쏘쏘리, 우쥬플리즈 세이 어게인?"


"옥께이, 와이뚜유씽크디스포지숀~~?"

"........ 플리즈 리핏 어게인?"

두 번이나 못 알아들은 나를 위해 필리피노 시니어가 도와주겠다며 통역해 주었다.

"Why do you think this position is right for you?"

'오~~ 들려 들려.'

"blah blah~~~" 내 강점을 들어 답변했다.


그의 질문이 이어졌다.

"옥께이 oo, 플리즈디스크라 입떠쁘로세스오브 디스웍뀨해버익스피어리언스?"

이번에도 내 귀는 반응하지 못했다.

'내가 왜 이러지? 무슨 말이지? 뭐지? 왜 하나도 들리지가 않지? 이게 영어 맞는 건가? 내가 너무 긴장해서 이러나?' 이렇게 영어가 안 들리기는 처음이었다.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는 내 모습을 보고 눈치챈 필리피노 시니어는 이제 모든 질문을 통역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따갈로그어 같고 아프리카 부족어 같은 인도 영어를 듣고 있으니,

아니 그런 영어를 난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귀신같이 알아듣고 통역하는 필리피노를 보고 있으려니.

이 업무가 어떻든 간에 난 부적격하다 생각하게 되었다.

반드시 인도인이 해야 할 일 같다고 이 상황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요청한 적도 없는데 다음 질문에서 아주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 꾹꾹 눌러 담아 말하기 시작했다.

"잇쓰! 디퍼런트! 뿌롬! 왓! 유해버! 익스피어런스! 쏘우파아, 소우 캔 유 두 잇 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 진짜~~~~~~그렇게 말해도 못 알아듣겠어!'

영어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나 중심적이고 듣기 편한 영어만 반복하고 있었다는 현실자각과 함께 더 이상 이 인터뷰를 진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난 못 알아들었고, 자꾸만 한국말로 "잠깐" 이 튀어나와 너무 괴로웠다.

나는 자신에 차 있고 생기 넘쳤던 첫 모습과 달리 너무 빠르게 울상이 되어갔다.

결국 그의 질문과 상관없이 인터뷰를 더는 못하겠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그 무렵 자기 합리화가 시작되었는데 '이거는 잉글리시 아니다. 인글리쉬다.'


그 역시 자기가 한 말을 한 번에 알아들은 적 없는 내 반응에 괴로운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울상이 되어갔고,

통역사가 돼버린 필리피노 시니어는 상황을 수습하기 바빴다.

난 이미 포기했고, 인도 매니저도 시간낭비했다는 표정으로 '옥께이'만 연신 내뱉었다.


인터뷰 결과는 지금 내 보스에게 공유될 것이고

며칠 안에 결과를 안내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들은 화상미팅을 빠져나갔다.

그 자리에서 엎드려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도 없는데 창피하고 쪽팔려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식은땀과 진땀 온갖 땀, 기대한 만큼 무력감이 가득 몰려왔다.

'보스한테 뭐라 말하지? 엉망진창 인터뷰 결과를 들을 텐데, 뭐라고 하지?'


인생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 같다.

좋은 일과 힘든 일이 공존한다.

회사에서 기분 좋았는데 집에 가서 남편과 싸우거나

남편과 사이좋았는데 아이가 아프거나

보스가 날 믿어줬는데 인터뷰 죽을 쑤거나

.......

내가 기운 빠져서 뭐 달라질 게 있나?


지금 하는 일이나 잘하자.

고개를 들고 방을 뛰쳐나가 인도 매니저가 보고하기 전에 보스에게 먼저 말하자

"난 지금 일이 좋아요!!"라고.

새로운 일에 눈 돌리지 말고 지금 하는 일을 더 잘해보자.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하던 업무에 대한 감사와 말 통하는 보스와 일하는 게 어디야 하는 안도감이 순식간에 차올랐고

심호흡을 거듭하며 스스로 최면을 걸고 나니 진정되었다.

내 자리로 돌아와 곧장 보스에게 보고했다.

"난 보스가 내 보스여서 좋다고, 지금 하는 일이나 잘하겠다고"

어이없다는 듯 째려보며 유쾌하게 웃는 보스의 웃음소리가 오늘따라 정겹다.


'오늘은 내 인생 최악의 인터뷰였다고, 인글리쉬에서 망했다고.' 이건 나중에 말해야지.....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3화대한민국 워킹맘의 비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