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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Feb 21. 2024

새우 환자

의대생 증원과 전공의 파업, 그리고 환자

요즘 의대생 증원 문제로 뉴스가 시끄럽다.

정부는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고, 이에 질세라 의료계에서도 의대생들은 휴학 및 수강거부, 대학병원 전공의들은 사직서를 내면서까지 격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에 대한 대응으로 오죽하면 '의사면허를 취소하겠다'는 말까지 나오는 마당이니, 사태의 심각성이 나날이 극단을 향해 치닫고 있다.


알다시피 사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나는 사회정책이나 의료 시스템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고, 의학 지식이라 할 것도 내 병과 관련하여 조금 알고 있을 뿐, 아는 게 없다. 하지만, 지난 2020년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었고, 그때 난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환자의 입장에서, 나의 지난 '현장' 경험을 토대로, 또다시 반복되는 이 사태를 바라보며 드는 생각은 하나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물론, 고래는 정부와 의료계이고, 새우는 환자다.

정부 vs 의료계 대결 구도에 최대 희생자는 단연 환자들이다. 정부는 의료계가 국민과 아픈 환자들을 상대로 반인류적인 행동을 하는 거라고 여론몰이를 하지만, 이에 휩쓸려 이를 환자 vs 의사라고 믿게 된다면 큰 오산이다. 환자는 어느 쪽에도 껴있지 않다. 안 그래도 아픈 것도 서러운데, 두 고래 사이에서 말 그대로 등만 터질 뿐이다.




늦여름 즈음인가, 또다시 응급실을 거쳐 부인과병동에 입원을 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응급실은 물론이거니와 매달 2주 가까이 입원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수술 후유증에, 항암 부작용에, 복수천자에, 배액관 시술에, 감염에, 끊이지 않는 각종 (그들의 말로)'이벤트'들...


여지없이 한 달을 못 버티고 또 입원을 했던 그때, 어느 날 갑자기 내 주치의가 사라졌다. 한창 병원 안에서도 의대생 증원에 관련해서 시끄럽긴 했었지만, 설마가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뉴스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내가 직격타를 맞다니.


대학병원에 장기 입원을 해본 사람들은 잘 안다. 의료진의 노고를. 간호조무사, 간호사, 인턴, 레지던트, 전문의, 교수님까지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그 수많은 일들을 다 해내는지 정말 감탄만 나온다. 당시 내 주치의는 친절이나 성의와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그들이 얼마나 바쁘고 정신없는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입장도 이해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걸거라.

한 손엔 차트를, 발엔 그들의 분신과도 같아 보이는 크록스를 신고 쏜살같이 병동을 이리저리 쏘다니는 내 주치의.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물어볼 게 있어서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는데, 너무 바빠 보여서 언제 말을 걸어야 할지 눈치만 보는 사이 또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내 주치의. '몇 살일까? 어려 보이는데, 또래 아닐까? 나보다 어릴까? 아마 1년 차쯤 되지 않았을까?'  언젠가 다시 나타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거나, 간호사 선생님을 통해 말 좀 전달해 달라 부탁한다.


일주일에 두 번, 수술이 밀리기라도 하면 겨우 한 번, 회진 때에만 뵐 수 있는 하늘의 별따기 같은 교수님과 나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내 주치의가, 이번엔 아예 병원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 그럼 난 이제 어쩌란 말인가? 내 치료는 누가 상세히 관리해 주나?

그나마 난 양반이다. 그래도 이미 입원 중이었으니. 원래 입원 예정이었던 환자들의 입원이 잠정 연기되었고, 항암치료를 받는 암환자들의 항암이 잠정 연기되었고, 잡혀있던 암 수술들이 연기되었다. 병원은 비상에 걸렸고,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 의료진들을 더 총 동원해서, 남아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빈자리를 메꿔야 한다.


나는 당시 전공의들이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을 때, 병원이 어떻게 버텼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뉴스에서 의대생 증원이고, 의사 파업이고 얘기할 때, 우리나라 의료 최전방에 있는 Big5 병원들에까지 영향을 미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주치의가 갑자기 사라지더니, 병동의 풍경 또한 한순간에 바뀌어 버렸다. 회진 시 양 옆으로 전공의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교수님들이, 이젠 홀로, 또는 기껏해야 남아있는 한 명의 레지던트와 단 둘이 회진을 다니기 시작했다. 운동으로 병동을 돌며 입원수속 접수처 앞을 지날 때면, 입원 및 항암치료의 잠정 연기를 알리는 전화 소리가 계속됐고, 당일 예약돼 있던 입원 대기자들은 그 앞에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다. 항암 치료 일정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


나 또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당최 알 길이 없었다. 검사 결과, 나의 현 상황, 치료 계획, 모든 게 불확실했고, 이에 대한 답을 줄 사람은 없었다. 간호사들도 많이 난처한 모습이다. 그들도 우리만큼 혼란스러운 듯하다.

뭐 환자가 보는 엄청난 피해는 말할 것도 없지만, 내가 본 바로는 이건 같은 의료진도 피해를 입는 방식이니 의아하다 생각했다. 병원에 남아있는 의료진들이 전보다 2배, 3배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병원은 입원한 환자들을 어떻게 해서든 치료해서 퇴원시켜야 하는데, 병동을 꽉 채운 환자들은 그대로고 치료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은 턱없이 부족해졌다.  남아있는 의료진들이 얼마나 더 힘들지 굉장히 안타까웠다.


내 담당 교수님은 원래도 여러 명의 전공의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 산부인과 의사가 그만큼 부족해서였을까 싶다. 보통 한두 명이 함께였는데, 이젠 거의 혼자 아니면 겨우겨우 윗년차 레지던트?전문의? 한 명과 회진을 오셨다. 난 항상 저 나이에 어떻게 매일 기본 12시간을, 그것도 수술, 외래, 회진(입원환자 관리) 등의 중대 업무들로만 이루어진 살인적 스케줄을 소화하시는 건지 경이로웠다. 근데 그런 교수님을 서포트하는 전공의들, 레지던트들이 사라졌으니, 그 몫은 그대로 교수님에게로 얹어졌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로 나는 교수님을 좀 더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더 케어받는 느낌이 들었고, 교수님이 더 가까이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주치의가 사라졌으니 그 역할까지 교수님이 어느 정도는 대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회진 시간을 놓친 바람에, 퇴근시간도 훨씬 지난 늦은 저녁에 병동 간호사실에 앉아 (아마 레지던트나 수간호사에게) 환자 브리핑(?)을 듣고 계시던 교수님의 그 무거운 어깨가 생생히 기억난다. '참, 교수도 정말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저걸 어떻게 몇십년을 하셨을까.. 대단하시다. 존경스럽다.'


그리고 얼마 후, 나에게 새로운 주치의가 임시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또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보호자인 엄마는 바뀐 주치의를 훨씬 더 좋아하게 되었다. 경험에서 뿜어 나오는 왠지 모를 여유와 포스 때문일까, 훨씬 친절했고 무엇보다 설명을 성의 있게 잘해주었다. 의학 전문 지식이 없는 환자와 보호자의 입장에서 병원의 상황은 답답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설명을 쉽고 자세히, 성의껏 해주는 주치의에게 마음이 간다. 환자의 입장도 어느정도 이해할 줄 아는 그녀를, 병동에서 가장 젊은 환자였던 나와 보호자인 우리 엄마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그녀를, 나는 어린아이처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다행히 나에겐 항암이 하루이틀정도 미뤄진 것 말고는 별 피해가 없었지만 (오히려 위와 같이 좋은 점들이 있었다), 수술, 시술, 항암, 입원 등이 예정되어 있던 환자들에겐 너무나 억울하고 서러운 일임이 틀림없었다. 그나마 대형병원이라 어찌어찌 돌아가긴 했지만, 그 내막에는 남은 의료진들의 엄청난 헌신 또한 있었다.




나는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의사들이, 금전적 목적이 아닌, 사람을 살리고자, 아픈 사람을 낫게 해 주고자, 선의와 사명감을 원동력으로 열심히 노력해 의사가 되었다고 믿는다.

실제 내가 봐온 내 병원 내 병동 간호사와 의사들이 그랬다. 머리가 좋다고, 공부를 잘한다고만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는 걸 병원생활을 하며 느꼈다. 그들은 환자를 위해 자기 자신을 갈아 넣는 사람들이지, 악의적으로 환자에게 불이익을  사람들은 결코 아니.


지난 2020년 때보다 이번이 더 심각한 상황인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증원이 필요하면 증원을 해야 하고, 필수의료 및 지방의료의 업무 환경과 처우 개선 또한 시급한 문제인 듯하다. 난 의사가 되어본 적이 없고, 국가정책연구원이 되어본 적도 없고, 그냥 수많은 환자 중 한 사람이다. 이 문제에 대해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이유다.


 문제편들기 싸움이 아니다. 희생자 새우는 그 누구의 편도 들 수가 없다.

다만,

하루빨리 두 고래가 *협상*을 이뤄냄으로써 커져만 가는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고래 모두 일방적인 주장과 막무가내식의 대응이 아닌, 서로 한 발씩, 두 발씩 양보하는 그런 어른다운, 성숙한 협상이뤄내길 간절히 바란다.

새우 등을 지켜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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