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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두나무 Mar 15. 2024

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그것이 이혼 사유는 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그때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하게 하는 사람은 남편이다.


이 남자랑 결혼 안 하고 그때 내 초등학교 친구 형이랑 소개팅했을 때 그 오빠랑 결혼했으면 더 사랑받고 살았을까? 더 행복할까? 아니면 그때 그 애? 그 남자? 아니면 교생 실습 나갔을 때 만났던 다른 대학교 오빠와 결혼했으면 다른 인생을 살고 있겠지? 사실 이런 생각을 하면 끝이 없다.


기억 회로를 재빨리 돌려보면 나는 그(남편)의 솔직함이 좋았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데도 불구하고 무게잡지 않았고, 그가 덜 불편하게 느끼게 된 건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나와는 달리 아주 작은 것까지 말로 다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 부분이 그를 소탈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했다. 물론 결혼 후 몇 년 지나 소탈하지만 은근 가식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이혼 사유는 될 수 없었다.


남편이 결혼한 해의 나이가 38살이었다. 그야말로 노총각이었다. 나랑 8살의 나이차가 나는데 결혼 후 부부동반 모임이 꽤 많았다. 모임에서 식사 후 항상 2차로 노래방을 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노래방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 성시경의 '거리에서'를 멋지게 부를 거라 예상했지만 약간 트로트 같은 분위기로 불러서 내가 맥주를 원샷하게 만들었고(본인은 성시경이랑 똑같이 부른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신나는 댄스곡을 부르면 무대를 휘어잡는 막춤으로 나의 뒷목을 잡게 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노래방 룸의 문에 매달리는 것이었는데 그걸 본 순간 나는 마시던 맥주를 입 밖으로 뿜었다. 나는 살면서 노래방 룸의 문짝이 그런 용도로 쓰일 수도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그 뒤로 며칠이 지난 후 남편의 허벅지 안쪽에 퍼렇게 멍이 든 걸 봤고 그건 노래방 문짝에 매달린 영광의 상처였다. 남편의 멍든 허벅지를 보면서 그것이 이혼 사유는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부부동반 모임을 갈 때마다 차에서 나는 말했다.

"오빠, 오늘은 제발 문에 좀 매달리고 하지 마요"

"어, 알았다. 근데 그게 들어갈 때부터 마음먹고 하는 게 아니라 분위기에 취해서 그런 건데 오늘은 자제할게."

그랬던 그는 이제 더 이상 문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럴 만큼 점프력도 관절도 에너지도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곧 영감이다(남편 미안...)


아무것도 아닌 일에 불 같이 화를 내고, 기분이 좋고 싫음이 온얼굴에 써놓은 듯이 티가 나고, 어머님이 그러신 것처럼 모든 것이 궁금하고 모든 상황을 자세히 알고 싶어 하고, 어머님과 함께 살았던 예전 주택에 여름이면 나방 같은 것이 거실 쪽으로 들어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제일 먼저 방으로 도망가 숨고, 아이가 아파 밤새 열이 나서 잠을 한숨도 못 자는 나와는 별개로 코 골고 잠만 잘 자고, 술 마시고 뻗어서 주차장 차 안에서 자는 바람에 주차장까지 가서 자주 모시고 와야 하고, 아이가 기저귀 차고 다닌 4년 동안 단 한 번도 갈아준 적 없고.... 그리고 더 많은 상황들이 내가 이 남자랑 결혼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설정을 만들게 할 만큼 속상하고 외롭고 드럽게 치사하다고 생각한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가 내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던 순간들 때문에 다시 마음을 고쳐먹기도 했다.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던 날, 정신이 반쯤 나간 나와 엄마를 대신해 상주가 해야 할 모든 일들이 알아서 잘 처리해 주었고, 여행을 가면 모든 스케줄을 A와 B로 나누어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쯤은 외식을 해야 와이프가 짜증을 덜 낸다는 걸 알고, 꽃다발은 단 한 번도 사준 적이 없지만 실용성 있는 선물로 기분 좋게 해 줄 줄도 알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우고 나서 '우리 계속 같이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자'라는 말을 밥 먹듯 하다가도 정작 분위기가 심각하다는 걸 알면 은근 내 눈치를 살핀다. 거실에서 딸과 내가 티브이를 보고 있으면 방에서 스르륵 나와 요상한 막춤을 추며 실없이 웃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나의 가장 소중한 딸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이 나를 또 살게 만들었다.


만약 이 남자랑 결혼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을 세우기보다 내가 선택한 나의 배우자와 내가 만들어낸 나의 가정을 잘 지켜내고 더 단단히 다듬어 가는 게 나에겐 더 중요했고 중요하다.


나는 참 독립적인 사람이지만 둘이어서, 둘이 셋이 되어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삶은 '만약'이라는 세상을 굳이 떠올리지 않게 하는 온기가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 책은 줌파라히리의 여러 단편을 묶어 놓은 책이다. 그러나 각각의 단편들을 모아 놓고 보면 공통적인 면이 있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제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차갑지 않은 따뜻한 인간미가 있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단정하지만 디테일하게, 깊숙하지만 모나지 않게 표현할 줄 아는 그녀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그중에서 '축복받은 집'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른 남녀가 만나 서로에게 끌려 결혼까지 하게 되었지만 결혼은 결국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만든 단편이었다.


우연인지 아닌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별다른 거 없이 건강히 각자의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면 아이와 함께 모여 밥을 먹을 수 있고 여전히 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축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p227) 그녀는 그렇게 사소한 것에 흥분하고 즐거워했으며, 새로운 맛의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나 우체통에 편지를 넣을 때같이 예상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두 손가락을 포개며 행운을 빌곤 했다. 산지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이 세상에 자신이 예상할 수 없는, 또는 알 수 없는 경이로움이 숨어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소녀티를 벗지 못한 얼굴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눈에는 근심 걱정이 없었고, 아름다운 용모는 어딘지 불안정해 보였다. 아직은 표정이 확실하게 자리 잡지 못한 얼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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