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des Sosa
"그녀와 같은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목소리는 물론이고 사람 그 자체로도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진 기념비적인 존재입니다. 티나 터너처럼 생기지는 않았지만 무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지요.... 그녀와 같이 공연을 할 때면 저는 무대 위에서 내내 울었었어요. 그게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었었지요. 하지만 어느 날 저녁 나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었지요. 가수들에 관한 한 그녀는 한마디로 최고였어요.(simply the best.)"
한 사람이 감동에 겨워 무릎을 굻고 발에 입을 맞추게 만든 그녀는 누구였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입을 맞춘 사람은 또 누구였을까요? 오늘은 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오래전부터 음악과 음악인들에 관한 글을 쓰려는 마음을 먹고 제가 준비한 음악인들의 리스트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한국에 잘 알려진 음악인은 물론이고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분명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이라고 제가 생각하는 음악인들도 있습니다. 그중에는 비영어권의 가수이지만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가수들이 있는데 그 리스트의 위에 적어둔 이가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입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가수로서 침묵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희망의 목소리 또는 그녀의 검은 머리 때문에 "라 네그라(La Negra)"라고 불렸는데 처음 제가 이 리스트를 만들 때만 해도 그녀는 여전히 활발한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고령으로 인해 무대에 서서 노래하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노래했지만 깊고 풍부한 그녀의 알토는 여전했었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세상을 떠난 것이 2009년이었으니 제가 만들었던 그 리스트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아시겠지요.
먼저 메르세데스 소사가 낯선 분들을 위해 그녀의 곡 중에서 우리나라에 아마 가장 많이 알려진 인생에 대한 찬가, "그라시아스 알라 비타(인생에 감사하며, Gracia a la Vida)"를 먼저 소개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INZ1OfRDuE8
"나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준 인생에 감사합니다. 별처럼 빛나는 두 눈을 주어서 그 눈을 뜨면 검은 것과 흰 것을 구별하고 깊은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들을 찾게 해 주었고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었지요."라고 시작하는 그녀의 노래는 인생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원래 칠레의 가수이자 작곡가이고 시인인 비올레타 파라(Violetta Parra)의 노래였는데 우리에게는 메르세데스 소사의 힘 있는 목소리로 잘 알려졌습니다. 1971년에 메르세데스 소사가 발표한 앨범에 실렸던 이 노래는 다른 나라의 가수들도 자신들의 언어로 불러 앨범에 실었는데 그중에는 미국의 포크 싱어인 존바에즈(Jon Baez) 도 있습니다.
그리고 메르세제스 소사와 존 바에즈가 바로 이 글의 서두에서 소개한 인용문의 주인공입니다. 한 사람이 감동에 겨워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추게 한 그녀는 바로 메르세데스 소사였고 입을 맞춘 그 사람은 바로 존 바에즈였습니다. 그 일은 1988년에 두 사람이 유럽을 순회하며 공연하는 동안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메르세데스 소사는 1935년 아르헨티나 북서부 투쿠만(Tucuman)이라는 곳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삯빨래를 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어린 시절에 겪은 그러한 가난한 생활은 그녀가 자라나서도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않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15살이 되던 1950년에 지역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주최한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였고 그 방송국에서 2개월간 전속으로 노래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가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1950년대를 거치며 아르헨티나와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60년대부터는 유럽과 북미를 순회하며 공연을 했다고 합니다. 이미 10대 말부터 페론주의자들의 집회에 함께 하며 그곳에서 노래했던 소사는 나이가 들며 음악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은 이른바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음악, Nueva Cancion)" 운동의 대표적인 가수로서도 활동했습니다.
아르헨티나라는 나라는 우리에게 탱고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언젠가 소개해 드렸던 탱고의 전설적인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이 활동을 했고 그의 무덤이 있는 곳도 그곳이지요. 그런데 메르세데스 소사의 음악은 탱고와 거리가 있습니다. 실제 그녀가 태어나고 음악을 처음 접한 곳은 볼리비아에 가까운 아르헨티나의 북서부인 투쿠만 지역으로서 이곳에는 안데스 산맥에 사는 인디오들의 전통 음악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었지요. 그녀 자신도 언젠가 탱고의 전형적인 발음이나 억양을 따르기가 너무 어렵다고 고백을 한 적이 있을 만큼 그녀는 탱고와는 다른 배경에서 성장을 한 것이지요. 이처럼 인디오들의 전통 음악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그녀의 음악은 그녀가 늘 가지고 다니며 연주하던 봄보(Bombo)라 불리는 전통 북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노래는 20세기 초반에 많은 활동을 한 가수이자 기타리스트로서 아르헨티나의 전통음악을 수집하고 알리는데 힘을 기울인 아타후알파 유판키(Atahualpa Yupanqui)의 음악인 "두에르메 네그리토(Dureme Negrito)"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며 메르세데스 소사는 봄보를 연주합니다. 기타와 북이라는 아주 단순한 악기들의 조합이지만 감성 풍부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더할 나위 없는 반주가 되었습니다. 목소리와 악기 그리고 그 소리들을 만들어 내는 가수가 일체가 된 모습은 비록 가사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을 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R9AJwjZeIg
위에서 소개드린 노래의 제목을 번역하면 "잘 자거라 (검은) 아기야" 정도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 노래는 자장가이기는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의 힘든 삶을 동시에 노래하고 있습니다. 엄마가 일하러 나가서 아가에게 맛있는 것들을 사서 올 테니 자장자장 아가야 자거라 하는 노래는 "엄마가 섬그늘에"라고 시작하는 우리나라의 노래인 "섬집아기"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훨씬 더 직설적으로 삶의 고달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 속에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수로 활동을 하며 그녀는 정의와 인권 그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노래를 통해 전달하려 했고 그것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에 기여하려 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자신이 믿고 실천하려는 것들을 진정한 예술성과 함께 결합시켰다는 말을 듣기도 했을 만큼 그녀가 부르는 노래들은 들은 딱딱하고 듣기에 불편한 선동적인 노래가 아니라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노래들이었지요. 아름다우면서도 또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주고 그들이 행동하게 만드는 노래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1970년대에 들어서 남미 각 국에 들어선 군부 독재 정권에게 메르세데스 소사와 같은 가수들은 요주의 대상이었습니다.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렸던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칠레의 민중 가수 빅토르 하라(Victor Jara)가 고문을 받고 살해된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지만 소사 역시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1979년 라플라타(La Plata) 지역의 한 대학에서 열렸던 공연에서는 소사는 "관도 텡가 라 티에라(내가 땅을 가지게 될 때, Cuando Tenga La Tierra)"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농지 개혁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경찰이 공연장에 들이닥쳤고 노래하던 소사는 물론 악단과 공연을 관람하던 관객들까지 모두 연행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무대 위에 있던 소사는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몸수색을 당하는 치욕을 겪습니다. 훗날 한 인터뷰에서 소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경찰 한 사람이 무대 위에 올라와 내 몸을 수색했었어요.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내 가슴에 손을 대며 진행한 그 수색은 결국 나에게 창피를 주려는 의도였겠지요. 그날 나는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푸른색과 흰색이 섞인 아름다운 판초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경찰의 수색을 막지는 못했었어요. 그런데 수색이 끝나고 그 경찰이 내 손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 용서하세요. 메르세데스 여사, 하지만 그 사람들이 이렇게 하라고 시켰답니다."
사람들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메르세데스 소사에게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흘러나오고 지금도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마침 영어로 번역된 가사 자막이 달린 1983년의 공연 실황이 있어 소개해 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PRmUFSr8O94&
그리고 이 노래는 2019년에 만들어진 영화 "두 교황(Two Popes)"에서 교황이 되기 전 베르골리오 주교가 빈부격차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빈부격차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하면서 그들과 함께 한 프란치스코 교황이었으니 그가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보여 주는 씬에 쓰인 이 음악은 아주 적절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메르세데즈 소사의 힘있는 알토 목소리가 흘러나와서 제게는 이 영화가 더욱더 흥미로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Mqt0mPqr64
그런 탄압을 겪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연행과 석방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그녀의 공연 활동 일체를 중지시키게 됩니다. 공연은 물론이고 방송을 통해서도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없었는데요. 가수로서 그처럼 치명적인 박해를 받은 소사는 결국 유럽으로 망명길에 오릅니다.
1979년 망명을 떠난 직후 런던의 알버트 홀에서 열린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 주최한 공연에서 노래하던 소사는 자신이 더 이상 노래를 예전처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목소리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던 나라와 사람들의 곁을 떠나서 살아가야 하는 그녀와 마음과 정신이 노래를 계속할 수 없게 만들었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군사 정권의 만행을 보고 들은 그녀로서는 그러한 고통과 아픔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그러한 현실과 멀리 떨어진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웠겠지요.
마드리드와 파리를 거치며 3년의 망명생활을 보낸 소사는 1982년 군부 정권의 말기에 아르헨티나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군부 정권이 무너지고 민간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목격하며 희망과 평화를 노래했습니다. 단순한 가수가 아닌 민주와 정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고 남아메리카 전역에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를 노래로 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자유와 민주 그리고 정의의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지요. 1995년에는 유엔에서 뽑은 올 해의 여성이 되기도 했고 유네스코 친선대사로서 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3년간 고통스럽게 보낸 그녀의 망명 생활은 그녀의 음악을 훨씬 더 풍부하고 폭넓게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라면 생각할 수도 없었던 다양한 장르의 음악인들과 만나고 그들의 음악을 접하면서 그녀는 록과 블루스는 물론 클래식 음악에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노래했지요. 거침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노래했던 것처럼 음악의 장르에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변했다고 해서 그녀의 뿌리인 남아메리카의 전통음악을 잊은 것은 아니었지요. 해외 공연을 다닐 때면 남아메리카의 젊은 음악인들을 같이 데리고 다니며 그들이 연주하는 남아메리카의 전통 음악을 알리는데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녀의 아들이 했던 말처럼 그녀는 정말 자유롭게 거칠 것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조차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지요.
그녀가 남긴 대표적인 히트 곡 중의 하나인 "토도 캄비아(모든 것이 바뀌지, Todo Cambia)"라는 노래는 그런 그녀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에서 그녀는 "표면에 있는 것들이 바뀌고 또 깊숙한 속에 있는 것들 역시 그렇지. 네가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고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지. 일 년 동안 날씨가 바뀌고 목동은 짐승들의 무리를 바꾸지.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어야만 하는 법이니 내가 바뀌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 "라고 노래합니다.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 정권을 보았고 또 그들이 몰락하는 것을 본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 1999년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런던에서 영국 정부에 체포될 무렵 그녀는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연에서 그녀는 눈물을 지으며 피노체트가 가택 연금된 런던에서 이렇게 노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면서 바로 이 노래 "모든 것이 바뀌지(Todo Cambia)"를 부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g8VqIFSrFUU&
독재에 저항하는 정치적인 상징으로서 알려진 그녀이지만 자신은 노래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인권과 정의 그리고 평화를 위해 노래하지만 음악인들이 특정한 정당에 소속되는 것은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노래를 할 때 가장 행복했다고 하고 아르헨티나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던 것도 더 이상 노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것 역시 더 이상 고향에서 멀어져서 노래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년에 그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 광기가 사라지고 미친 사람들이 사라져서 기쁩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예술가들도 평화롭고 고요함 속에서 일하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인데 말입니다."
음악과 함께 치열하게 살아왔던 칠십 평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메르세데스 소사는 마침내 평안을 얻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처럼 많은 것을 베풀어준 인생에 감사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그토록 원하던 평안을 얻었기 때문에 저세상에서도 여전히 노래하면서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있을 거었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환갑이 넘은 나이에 메르세데스 소사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클래식 작곡가인 아리엘 라미레즈(Ariel Ramirez)의 미사곡, 미사 크리오자(Misa Criolla)를 노래했습니다. 가톨릭의 미사에서 사용되는 전례 음악은 여러 음악가들이 오랫동안 만들어 왔습니다만 라미레즈의 미사곡은 남미 인디오들의 전통 음악과 악기들을 이용해서 전통적인 미사곡들을 다시 해석한 음악입니다. 메르세데스 소사뿐만 아니라 호세 카레라스나 플라시도 도밍고 그리고 호세 쿠라 같은 성악가도 이 곡을 불렀는데 종교 음악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 꼭 들어 보시라고 권합니다.
이 미사곡 중에서 "주여 우리를 불쌍이 여기소서(Kyrie, 기리에)"에 해당하는 "Señor ten piedad de nosotros"를 마지막 노래로 소개합니다. 메르세데스 소사의 목소리와 함께 화면에 흐르는 남아메리카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곳, 그리고 그곳에서 고통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아마 그것이 메르세세스 소사가 사람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GFajqCb1Vw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