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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cide Mio Sep 03. 2024

1900년의 전설

'1900년의 전설(Legend of 1900)'은 우리에게 '시네마 천국'으로 잘 알려진 주셉페 토르나토레(Giuseppe Tornatore)가 1998년에 만든 영화의 영어식 제목입니다. 한국에서는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졌고, 이탈리아어로는 '바다 위 피아니스트의 전설(Leggenda del pianitat sull'oceano)"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영화는 제목처럼 한 피아니스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직 보시지 않은 분들이라면 꼭 한 번 권해드립니다. 


1900년 어느 날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대서양 횡단 여객선에서 한 아이가 버려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선원들에 의해서 키워지던 이 아이는 발견된 해를 따서 "1900(Nineteen Hundreds)"라고 불리게 됩니다. 우연한 기회에 이 아이가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여객선의 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일하게 됩니다. 특이한 것은 이 피아니스트가 배에서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배에서 내려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평생을 배 위에서 살아온 셈이지요. 그러면서 배를 타는 승객들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레코드를 들으며 음악을 배웁니다.


일견 황당한 이야기인 듯 한 이 영화를 보신 후 영화 속의 이야기들을 되새겨 보시면 영화 속에 배, 바다, 항구, 육지, 기착지, 동일한 여정을 반복하는 여행, 음악,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 등등 상징적인 코드와 대사들이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에 주목해서 보느냐에 따라 영화의 전체 스토리가 다른 의미로 생각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영화 속에 산재한 상징적인 코드들 때문에 영화를 볼 때마다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도 있지만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시네마 천국'에서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주었던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의 솜씨가 다시 한번 유감없이 발휘된 영화가 바로 이 영화입니다. 어찌 들으면 '시네마 천국'의 음악과 분위기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지만 그의 감미로운 음악은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귓가에 남아있을 겁니다. 이 영화에서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과 함께 영화의 배경이 된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재즈 음악도 많이 사용되었는데 재즈는 단지 배경음악으로서만이 아니라 영화의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한 축을 이룹니다.


대서양 횡단 여객선의 클럽에서 일하는 피아니스트에 대한 소문이 육지에까지 퍼지자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재즈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제리 롤 모튼(Jerry Roll Morton)이 배에 올라 피아노 대결을 벌입니다. 물론 제리 롤 모튼은 실존 인물이지만 영화 속의 스토리는 가공의 이야기이지요. 어쨌든 배 위의 클럽에서 두 사람은, 문자 그대로, 불꽃 튀기는 피아노 결투를 벌입니다. YouTube를 찾아보니 마침 그 결투 장면이 여러 편으로 나누어져 올라 있기에 올려봅니다.


여객선의 클럽에 제리 롤 모튼이 들어서고 일순 정적이 흐릅니다. 단숨에 위스키 한 잔을 들이켠 제리는 피아노로 다가가서 주인공에게 "자네, 내 자리에 앉아 있구먼" 하면서 결투를 시작합니다. 결투에 앞선 두 사람의 대화가 흥미롭습니다. 


"당신이 재즈를 발명한 사람이지요?

"남들이 그렇다는 구만."

"당신은 바다를 엉덩이 아래 깔고 앉지 않으면 피아노를 못 친다는 그 친구지?"

"내가 그렇다고 하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5USKFpk2E3Y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제리 롤 모튼에 비해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경쟁을 하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느긋한 태도로 결투에 임합니다. 그런데 상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태도는 오히려 상대를 더 자극하고 공격적으로 만듭니다.  3 회전에 걸쳐 이루어진 이 결투에서 2 회전에 연주된 제리 롤 모튼의 "Crave" 란 곡은 재즈이지만 중간에 마치 클래식 피아노 소나타를 듣는 듯한  느낌이 같이 나는 너무나 멋진 곡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yHLYc8IJT0

여객선의 동료들이 모두 주인공에게 돈을 걸었지만 자신이라면 상대에게 걸겠다고 하면서 주인공은 상대방의 연주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연주곡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2회전을 끝내지요. 하지만 이것은 상대를 더 자극합니다. 3회전에서 자극적인 말과 함께 공격적으로 연주하는 제리 롤 모튼에 대해 주인공도 문자 그대로 피아노에서 불꽃이 튀는 연주를 선 보이면서 결투를 승리로 마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UPftoWxFnY

피아노 결투도 흥미롭지만 제가 이 영화의 백미로 생각되는 장면은 (물론 영화를 볼 때마다 이 생각은 달라집니다만) 주인공의 피아노 실력이 소문이 나고 마침내 레코드 회사에서 와서 그의 피아노 연주를 배에서 녹음하는 장면입니다. 


녹음이 시작되고 자유분방하게 건반 위를 움직이던 주인공의 손가락들이 한 여인의 모습이 창을 통해 보이는 순간 멈춥니다. 그리고 나서 부드럽고 천천히 그러나 애절하게 움직이면서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해 나갑니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특히 이 장면에서 배에서만 볼 수 있는 둥근 선창을 통해 클로즈 업 되었다 다시 멀이지는 여인의 얼굴은 마치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화가들의 초상화를 연상시킵니다. 이 때 연주된 음악이 이 영화의 주제 음악으로 알려진 엔니오 모리코네의 "Playing Love" 인데, 과연 이런 음악으로 표현된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생각해 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UIgReYNMac

제가 처음 음악을 듣기 시작했던 80년대 즐겨 듣던 라디오 방송이 밤 10시경에 하던 '김세원의 영화 음악실'이었습니다. 엽서를 보내는 극성 파는 아니었지만 카세트테이프를 잔뜩 준비해 두고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녹음을 해놓고 다시 듣곤 했었습니다. 그때는 영화 음악과 같은 흔히 말하는 Easy Listening 계열의 음악을 좋아했었지요. 그러다가 점점 취향이 바뀌면서 록, 메탈, 클래식, 재즈, 블루스, 등등 음악에 관한 한 잡식성이 되었죠.


그런데 그처럼 다양한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처음 좋아하던 이지 리스닝 계열의 음악으로는 관심이 쉽게 돌아가지 않더군요. 그 따위 유치한 음악을 내가 들었었다니, 하면서 마치 지우고 싶은 과거처럼 여겼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점점 들어가다 보니 자연스럽 게 귀가 예전 십 대때 좋아하던 음악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런 음악을 들을 때면 음악을 즐기는 것이 뿐만 아니라 그런 음악을 듣던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때때로 음악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과거의 추억과 연결이 되어 있고 마치 버튼을 눌러 재생시키는 것처럼 음악을 들으면 거의 동시에 떠오르는 추억들이 있지요. 저는 이런 이지 리스닝 계열의 음악을 들으면 라디오 앞에 엎드려 있던 십 대의 제 모습이 떠오른답니다. 여러분도 그런 음악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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