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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사 이명지 Mar 15. 2020

버려져도 괜찮아

ㅡ육십, 뜨거워도 괜찮아 05

어둠이 내린 백사장에서 춤을 춘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것처럼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처럼
아무것에도 꺼둘리지 않은 것처럼
버려진 집시 여인처럼 춤을 춘다.
바람이 목덜미를 핥는다.

 해가 지면 슬슬 바다로 나간다. 어둠이 내려앉는 백사장을 천천히 산책한다. 이어폰으로 흘러드는 음악은 언제나 바흐의 무반주 첼로다. 밤바다의 빛깔은 장엄한 푸른빛이다. 슬프게 먹을 품은 프러시안 블루, 그 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철썩이는, 포말의 화이트와 잘 어울린다.  
어둠이 완연하게 나를 가려줄 때쯤이면 나는 전화기의 음악을 춤곡으로 바꾸고 천천히 그루브를 탄다. 파도의 근육이 비트(Beat)를 쪼깨며 달려든다.

스텝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쁘다. 모래알이 튀고 발자국이 구덩이를 만든다. 제주바다의 억센 봄바람이 봉두난발한 내 머리카락 깊숙이 손가락을 찔러 넣는다. 

  스스로 버려져 제주로 온 지 두 주일째. 나는 혼자 노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아직도 어둠이 나를 가려줘야만 자유로워지는 것은 여전하지만 조금씩 자유로움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세상의 시선과 의미 없는 관계와 내 의식의 규범과 공간의 한계, 무디어진 일상의 관습에서 일탈해보려 스스로 택한 버려짐. 버리고 들여다보기 위해 나는 떠나왔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를 한번 내버려 둬 보고 싶었다. 어떤 의미나 이유도 붙이지 않고 어떤 설명도 없이 그냥 한번 시공간 속에 던져두어보고 싶었다. 별 어려울 것도 없는 이 선택을 여태 하지 못하며 살다가 참으로 엉뚱하게 집 정리를 하다가 실행을 결심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얼마나 될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정리를 잘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차곡차곡 정리를 잘해두면 버릴 것이 없다. 물건은 많지만 산만하거나 복잡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은퇴를 하고 집에서만 지내다보니 어느 날 문득 내가 짐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내 집에 짐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이 집세도 안 내고 말이다. 사랑하는 아들도 서른 살이 되자 내 집에서 독립하라고 쫓아냈는데 감히 이것들이 말이다. 내가 짐 속을 비집고 다니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 없는 관성이란 얼마나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가. 벗어나 보지 않으면 자신이 잘 안 보인다는 걸 누구나 안다. 그런데 그 벗어나는 걸   못하며 살아왔구나 싶었다.  


 아무리 정리를 해도 도무지 짐이 줄어들지가 않았다. 수십 년간 함께 살았던 짐들이 의미와 추억의 카드를 빼어들며 나가지 않겠다고 한사코 버텼다. 식구가 넷에서 셋으로, 둘로, 결국 하나가 되기까지 버리고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짐이 줄기는커녕 늘어만 다. 크고 작은 네 개의 방, 거실, 이 공간을 혼자 쓰는데도 늘 공간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살면서 덜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이토록 끌어안고 살아왔는가? 짐을 정리하기 위해 이사를 할까도 고민했지만 그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집안의 짐들이 이럴진대 내 의식의 군더더기는 또 얼마일까 말이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나를 둘러싼 것들 로부터 내가 버려져 보기로.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왔다. 새로운, 낯선 것들이 나를 에워쌌다. 조금 두렵고 많이 설레는 자발적 버려짐.

작은 승용차 한 대에 실어온 짐들로도 큰 불편이 없는 생활이 신기하고 경탄스럽다. 소셜 포지션을 정리하니 자연히 짐이 줄었다. 내 옷방에 가득 채워진 옷들 중 트렁크 하나에 골라 담아온 것으로도 충분히 멋지고 몇 가지의 주방기구로도 충분히 배부르다. 더욱이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쌓여만 가던 못 읽은 책들에서도 도망치니 머리가 말갛게 비어져왔다.


내가 가진 것들은 허영에 필요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은 허영, 사용도 하지 않는 주방기구의 허영, 가장 심한 것은 지적 허영이었다. 문우들에게서 오는 신간이 며칠이면 책상에 수북이 쌓이지만 정작 나는 인터넷 서점에서 더 많은 책을 주문하는 축이다. 읽고 싶은 책을 쌓아놓으면 맛있는 음식을 쟁여두고 먹는 것같이 행복해서 많은 책을 사 들이지만 정작 다 못 읽고 책장에 꽂히는 수가 절반도 넘었다.  
 그간의 나의 허영이 부끄럽지는 않다. 이런 나의 허영이 지금까지의 나였고 내 삶이 딛고 온 동력이었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좀 다른 허영을 부려보고 싶다. 덜어내는 삶, 가식을 덜어낸 가벼움의 허영, 내 마음길을 따라가는 단순한 삶 말이다.


버릴 수 없다면 내가 버려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나와 봐야겠다고. 버려진 존재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주변이 단순해지니 내가 들여다보인다. 잡다한 것에 눈이 빼앗기지 않고 오롯이 나에게로 시선이 모아진다. 내 가슴이 내는 소리가 들린다.

은퇴는 소용의 가치를 다한 폐품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이라는 한 권의 책을 앞에 놓고 마지막 페이지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하는 멋진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성숙하고 매 순간 아름다워지고 있다.

 제주의 밤바다는 매일 밤 나를 유혹한다. 해가지면 나는 남자를 후리기 위해 출근하는 술집작부처럼 섹시한 드레스를 입고 바다로 나간다. 아직 맨발의 이사도라 던컨을 흉내 내지는 못한다. 춤 실력이 달리느냐고?

천만에! 삼월의 밤바다 모래사장이 아직 좀   발이 시릴뿐이다.
  

삼월의 제주바다, 그리고 숙소에서 보이는 마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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