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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사 이명지 May 08. 2020

엄마 사용 설명서

아들, 딸들아!

어미를 사랑하거든 먼저 이 설명서를 읽어다오.


 여자의 일생을 크게 네 시기로 나눈다면 ‘소녀기, 숙녀기, 모후기, 자립기’라고 말하고 싶다. 꿈을 가꾸던 소녀기에는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알아가고 숙녀기에는 자신이 살아갈 방향을 정하는 시기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어미가 되면 지금까지 누려왔던 피보호자의 위치에서 보호자의 신분으로 완전 변환된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이때부터 실행된다. 자신을 돌보는 일, 자신을 위한 그 무엇은 언제나 자식보다 후순위에 있게 되는 때도 이때부터다.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모성애는 늘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 이것이 모후 기다.
 자식들이 더는 어미의 손길이 거추장스러운 잔소리로 여겨질 즈음 어미에게는 ‘갱년기’라는 복병이 찾아온다. 자립기의 시작인 것이다.


갱년기는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무척 당황스러운 대 혼돈의 시기가 된다. 면역력이 감소되고 건강이 쇠락하고 강건하던 마음조차 함께 무너져 예민하기 이를 데 없어진다.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 선명하게 자각되는 시기이다. 우울하기 짝이 없다. 이런 심경을 몰라주는 가족들의 무심한 말 한마디는 벼랑에서 등을 떠미는 듯 아찔아찔한 현기증을 불러온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것이 사춘기라면 어른에서 다시 아이로 가는 것이 갱년기(更年期)가 아닐까. 여성들은 피할 수 없는 이 혼돈의 시기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법을 터득해 가야 한다. 곧 자립기가 되는 것이다.


 이 시기의 어미들을 위해 자녀들은 꼭 <엄마 사용 설명서>를 읽어주기 바란다. 한낱 가전제품 하나를 들여도 사용설명서가 있는데 인생의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한 엄마의 급격한 변화를 이해하는데 왜 공부가 필요하지 않겠니. 엄마는 한낱 물건이 아니지만 크리스털 그릇처럼 고귀하고 위험하고 예민한 시기의 어미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다시 찾고 당당하게 홀로 설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사용설명서인 것이다.

 첫째, ‘관계의 격’을 갖춰다오!
 아무리 가까운 부모 자식 지간이지만 함부로 대하지 말거라. 늙으면 자꾸만 초라해지는 마음이어서 조금만 버릇없이 대해도 힘이 빠지니 자식도 나를 무시하는구나 싶어 서운하다. 한없이 옹졸해진다. 나이 들어 힘없는 어미일수록 더욱 깍듯이 격을 갖춰 대해 주거라.

 둘째, ‘이런 상황’을 알아다오!
 어미가 겪는 심적 육체적 변화들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가 된다.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고 아이처럼 칭얼댈 것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경청’ 해 주는 것만으로도 상당 부분 치료된다고 하지 않더냐. 어미가 이렇다는 걸 알아만 주어도 반은 치유가 된다. 진심 어린 눈길이 명의의 손길만큼 중요하단다.

 셋째,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다오!
 젊었을 때 아무리 영민하고 인텔리였던 어미도 나이가 들면 어눌해지고 행동이  굼떠진다.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덜 들리고 기억력이 쇠퇴해 사물의 분별이 느려진다. 자꾸 되묻고 깜빡깜빡 잊어서 뭐 하나 찾는데도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너희들은 참 답답하고 속이 터질 것이다. 그러나 얘들아, 그것은 신의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나이가 들어도 젊을 때처럼 혈기왕성하다면 생명은 금세 마모될 것이다. 시, 청, 각조 차 온전하다면 젊은이들이 더 어려워질 게야. 인간은 본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남에게 가르치고 싶어 안달이 나는 족속이다. 노인이 보면 젊은것들이 하는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어 폭풍 잔소리를 쏟아낼 것이니 말이다. 모든 기능이 세월의 순리에 따라 쇠퇴하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 조물주의 축복이려니 생각하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다오.

 넷째, 어미도 여자임을 잊지 말아라!
 죽을 때까지 ‘어미도 여자’라는 걸 잊지 말아 다오. 예쁜 옷도 필요하고, 립스틱도 필요하고, 남자 친구도 필요하단다. 여자이기를 포기한 여자의 삶은 긴장감이 사라져 무기력하고 더 많은 병마와 고통에 사로잡힐 수 있다. ‘몸이 늙지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다. 여자 친구한테 꽃을 사주듯 가끔은 어미에게도 꽃을 사 주거라. 딸과 며느리는 친구처럼, 아들과 사위는 연인 같을 때가 제일 기쁘다. 가끔 데이트 신청을 해다오. 거울 앞에 선 시간이 길어질 때 어미는 생기발랄해질 것이다. 아픈 데를 잊을 것이다.

 다섯째, 떠나라, 자유를 주거라!
 자식들의 뒷바라지로 자신의 욕구를 희생해 온 어미들을 위해 이제 너희들이 역할을 바꿔줄 차례이다. 너희가 보호자가 되어줄 차례이다. 어미가 당당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그래서 행복할 수 있도록 너희들이 진정 독립하거라. 스스로의 길을 찾아 어미 품에서 멋지게 떠나거라. 어미에게도 마지막 인생을 비로소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살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욕구를 일 순위로 하며 살아볼 세월이 필요하다. 너희들이 응원해다오.

 이 설명서를 읽으며, ‘그럼 엄마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건데?’라고 생각한 자식이 혹 있다면 기억해 다오. 어미라는 자리에 있어주는 것으로 어미의 몫을 하려 한다는 것을. 너희들이 울고 싶을 때, 벼랑에 혼자선 듯 외로울 때, 언제든 달려와 얼굴 묻을 무릎과 말없이 등을 쓸어줄 어미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갈수록 마른 풀잎처럼 시들어 보잘것 없어질 테지만 어미라는 존재는 언제나 따뜻한 품일 것이다. 세상 모든 어미는 어디에 있어도 자식을 위해 두 손을 모은단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세상에 어미를 만들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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