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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 천사 May 05. 2023

불륜은 바람이 아니다

나도 공범이자 피해자였다.



"남편이 바람피웠어요!"

"그런데 XX남편이 이혼하자고 해요."

"내가 대체 무얼 잘못했나요?"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가 내게 던진 

항의조 질문이었다.

분노와 증오로 날 선 그녀의 질문뒤로

이어지는  울음소리는

시멘트 벽이라도 뚫을 기세였다.

그러면서도

불특정다수를 향해 홀로

시위하는 깃발처럼  외롭게 들렸다.

그 다수 중  하필이면

내가 죄인인양 붙잡히고 만 것이다.

황당하지만은 않았다.

나 역시 그녀처럼

누군가에게 소리치고 싶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참을 울다가

쉰 목소리로 누구냐고 물었다.

그녀에게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하진 않을 것이다.

불특정다수 중 하나면 되었으니.

그녀의 분노가 조금이라도

정리될 수만 있다면.

  "울지 마세요."  

"운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잖아요.'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다는 듯

그녀는 다시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목소리로는 삼십 대 정도?

암튼

그녀의 울음소리는 생존을

위협받는 순간 본능적으로 터지는

비명으로 위태로웠다.

당신이 누구든지 상관 안 하니

그녀에게 

구원의 동아줄을 던져주길 

간절히 원하는 애절함조차 담겨 있었다.


남편에겐 즐거운 바람?

그녀에겐 날벼락?

불공평한 부부스토리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 탓인지 화가 치밀었다. 

"그만 우세요! 제발!"

그녀는 겁먹은 아이처럼

잉잉, 울음의 볼륨을 줄이더니

 훌쩍였다.

"근데, 누구세요?"

그녀는 다시 물었다.

내가 누군지는 정말 궁금한

눈치는 아니었다.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는

눈물만 나는 순간이라는 말투였다.

그녀도 나도 전화를 끊지

않았던 이유가 있을까.

나로선

남의 가정사라 끊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쩌다 마주친 행인이 주저앉아 우는데

외면했을 때의  부담감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겐 자신의 고통을

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그 대상이

내가 되고 말았다는 것뿐이다.

그녀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다.

다만 그녀가 지주로 등록된

땅을 사기 위해 광고문을 보고

전화한 것뿐이다.

나 역시

남편의 외도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업무에 쏟아붓고 있던

한여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와의 통화는

지워버리고 싶었다.

남의 고통까지 덤으로 얹어

아파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한탄을

두 시간가량 듣고 말았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생각나는 대로 말해 주었다.

그녀는 통화하는 내내

고맙다면서 훌쩍거렸다.

불륜이 나에게만 습격하는 짐승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상한 위안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와 통화를 끝낸 후에도

그녀의 울음소리가

끈질기게 나를 붙들고 질문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누가?

언제부터?

불륜을 바람이라는 말로

가스라이팅했던 걸까?

한 때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한 번쯤은? 시대가 그러니?

그럴 수 있다고? 그렇다 치자.

피해자의 인생이 무너질

정도라면 이기적인 변명이 아닐까?

이혼도 요즘은 아무것도 아닌데 뭘?

수없이 들어왔던 말들 속에서

세상이 그러려니 살았다.

자신이 당하지 않은 일에는

관대한 습성이 있으니까.

타인의 고통에는 둔감해도 세금 안 내니까.


결혼도

시대의 흐름을 타고

변화되어 왔다.

신분과 가문,  종족 보존을 위한

 사회적 계약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오늘의 결혼은

부부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유전병처럼 불륜은 이어지고 있다.

결혼은 정말 미친 짓일까?

도덕적 편견이라는 말로

불륜도 사랑이라면서 옹호하기까지 한다.

대중화되면

살인도 미화될  수 있을까?

극단적인 질문이 생긴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륜 따윈 묻고 싶지도 않았다.

감기처럼 흔한

사회적 병리현상인지라

대책 없는 질문 따윈 소용없는 일이다 싶었다.

암환자가 늘어나도, 나만 건강하면

괜찮았으니까.

나라고 암세포가 아이쿠나

근접할 자리가 아니라며

피해 갈 일도 없을 텐데도 말이다.

그만큼, 나 역시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불륜도 마찬가지다.

나만 안 당하면 된다 식이었다.

불륜이 유혹의 손을 내밀어도

그 손이 누군가의 가슴을 찌르는

칼이 될 것이라곤 상상하지 않았다.

비도덕을 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도덕주의도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이도 저도 아닌

편한 대로 살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유부남의 은밀한 시선을 즐긴 적도 있었다.

남에게 피해 안 주면 된다는 범위에서

  그럭저럭 즐겁게 사는 거라

생각한 평범한 평화주의였다.

꼭 당해봐야 심각성을 아는

우둔한 사람이었다 해도 할 말 없다.

 어쨌든, 남편의 불륜으로 인해

화상 입은 심장은 아직도 화끈거리고 있다.

 악몽처럼 목덜미를 짓누르기도 한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을

흉터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불륜이 대체 뭐길래?

사전을 뒤적였다.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사람임을 포기하고

시작된 행위가 불륜이었다.

인터넷이나 맘카페 외도블로그 등

부스러기 상식도 찾아보았다.

다시는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불륜은 대책 없는 질병이라는

결론만 얻었다.

대상을 가리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연상케 했다.

가정이 파괴되고, 자식이 가출하고

심지어 피해자가 살해당하는

사건사고의 시한폭탄 같은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불륜이라는 지뢰밭에

살면서도 태연한 평화.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는

살벌한 드라마 속 엑스트라였다가

주인공으로 캐스팅되기 까진

별일 아니란 듯 무심한 현실이다.


불륜은

바로 이웃이 피해자요

가해자로 살고 있었다.

이웃이 파괴되는데도.

 불구경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 그 불길이 어느 날

내게로 옮겨 붙은 것이다.

사랑과 전쟁, 애로부부를

로맨스 드라마로 즐기는 동안 말이다.

쯧쯧, 혀를 차면서도

각색된 드라마려니 했는데.

막상 다가 온  현실은 그보다 더

비참한 리얼스토리였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의

가정은  신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울음소리가 사라진다면

정말이지 각자 생긴 대로 사는 세상이지

모른 척하고 싶었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우아함으로 포장된 불륜 드라마다.

"사랑한 것도 죄냐고?"

드라마 속

불륜남의 반론이었다.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당신이 사랑을 알기나 해?

이런 대사는 왜 없을까?

"남자가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할 수 있냐고?"

역시 불륜남의 철없는 변명이었다.

그 한마디에 숨이 턱 막혔다.

찬물을 들이켜도 막장 대사였다.

여자는 별종이라서 한 남자와 사느냐고?

왜? 묻지 않는지? 답답했던 장면이다.


불륜에 빠졌다는 것은

스스로 욕망의 노예임을

증명한 것이다.

불륜도 사랑이라는 말처럼

뻔뻔한 포장술도 없을 것이다

남의 아내와 남편을 도둑질하면서

사랑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이다.

그들 앞에선 사랑이란 말도

수치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불륜에 중독되면

양심을 지배하는

뇌하수체호르몬 분비가

정지된다고 한다.

소시오 패스처럼 타인의 고통에

공감력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배우자와 자식의 고통을

무시하게 된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뽕 맞았다는 말이다.

외도 심리학자의 연구 결과다.

불륜은

결혼을 숙주로 하는

양심을 갉아먹는 바이러스다.

'관계중독'이라는 증세로

표현하는 심리학자도  있다.


불륜은

백신 없는 전염병이다.

한동안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한 적이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불륜도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가정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다. 

잘못된 관계에 중독된 사람과 접촉으로

불륜의 연결고리가 이어진다.

자가방역시스템이 필요하다.

알코올중독치료시스템처럼

불륜중독치료도 대중화된다면 좋겠지만.

중독이라는 인식 부족 탓으로

사회적 장치가 허술하다.

가정을 파괴한 상간 위자료가

몇천만 원으로 해결된다면

결혼의 무게도

그만큼 가벼워진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불륜카페까지 등장했다.

배우자에게 들킨 경우

소송대응 정보를 교환한단다.

불륜이라는 유전인자도

자식에게도 물려줄 것처럼 당당한

그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용감하게 결혼해서

불륜에 빠지면 이혼해도 된다고?

배우자는 너의 행복을 위해

교체할 수 있는 소품이라면서?

자식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해 줄 수 있는지.

타락의 본질은

양심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다.

어쩌면 나도 정신없이 사느라

공범자였는지도 모른다.

방관도 공범이 될 수 있으니까.





우리의 결혼은

절벽 앞에 서 있다.

언제부턴가

불륜에게

떠밀리다 못해 추락 직전인데도

잘 살고 있다는 것이 무척 대견스럽다.

개인의 성적 자유를 추구하는 시대?

굳이 거론할 문제도 아니잖아.

그렇다. 소용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둘이 좋다는데 어쩌겠어? 이 말이

미워서 죽였다는데 누가 어쩌겠어?

라는 말이 되어 날아다닐 것 같아서

사람과 거리를 두게 된다.


불륜은 머지않아

사이보그와 결혼하는 시대를

꿈꾸게 하고 말 것이다.


불륜은

바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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