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다.
자식자랑하다 돈자랑까지
쏟아놓는 그녀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그저 가을바람난 김에 웃자고 만난
가벼운 커피타임일 뿐인데.
행복이라는 말이 실수처럼
커피잔 위로 퐁당 떨어지고 만 것이다.
벌과 나비가 왱왱거리는 설렘만으로
천국에 있는 느낌이었을까?
생각하면, 순전히
벚나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즐거워했을 뿐이다.
벚나무에겐
열매를 맺기 위한
생의 과정일 뿐인데도 말이다.
가을이 되면 이파리 마저
바람이 가져가 버린다.
더구나 홀로 알몸이 되어
겨울을 맞이한다.
그렇다고 벚나무를 보면서
불행한 생이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벚나무로 태어나 벚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생존을 위해
단풍을 앓는데
사람들은 단풍을 즐기면서
기쁨을 느끼곤 한다.
꽃나이적엔
자신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나이가 들어서야 돌아보면
아름다운 청춘이다.
하지만 청춘은
청춘의 행복을 모르고 산다.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한 시절에 행복을 몰랐던 것이다.
아이가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행복하게 웃는 것처럼.
행복을 추구하면서부터
우리는 행복과 더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정과 상황에 따라
오늘의 행복이 내일은
불행이 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할 것 같았지만, 살아보니
원수가 되는 부부처럼.
행복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그래서일까.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행복을 마음에서
놓아버리는 연습을 한다.
세상에 태어날 때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지
슬픔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꼭,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삶으로 나타낼 뿐이다.
어떻게 살든
행복이라는 저울로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지는 말라고.
나무보고 왜? 나무로 사느냐고
묻지 않는 것처럼.
밥 먹고 차를 마시고
옷을 입을 수 있다는 당연한
일상이 멈추지 않아
신기해서 미소가 번지거든.
행복해서 그러냐고?
글쎄?
불행한 것도 아니잖아.
행복이라는 말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거든.
굳이 행복하려고 애쓰지 마라.
남들에게 나는 이러고 이래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자랑할 것도 없어.
행복은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번져오는 따뜻한
살아 있음, 그 자체로 충분해.
사람도 나이가 들면
행복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아 있어서 흥이 날 때가 있다.
그렇게 바람에 훨훨 춤추듯이
살아 보는 것이다.
사진출처:https://blog.naver.com/yunchun4/222379749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