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마음이 답답하고 복잡한 날을 보냈다.
누구나 겪을 만한 날이라 어디에 하소연하기도 그런 날이었다.
그날따라 세운 계획이 다 틀어져, 발길 닿는 곳마다 나를 반기지 않았다. 괜히 우울하고 외로웠다.
나는 갑갑한 날이면 광화문에 들러 매번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을 구경하는 습관이 있다. 그날도 역시 그랬다.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작은 축제를 하는 모양이었다. 플리마켓들이 많아 이것저것 구경을 했다.
어떤 풍경, 물건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하고 아련하다. 마치 그가 그 공간을, 또는 그 물건을 좋아할 것만 같다.
나는 자개귀걸이를 보며 엄마의 얼굴을 그렸고 쿠키를 보며 친구를 떠올렸다. 막걸리 행사를 보면서는 취한 아빠 생각에 웃음 지었다.
그러다 작은 꽃다발을 보았다. 내 손보다 작은 것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내가 고3 때 돌아가셨다. 위암 때문이었다. 어느덧 6년의 시간이 지나 이제는 과거형이다. 나는 주로 좋아하시던 음식과 함께 간 장소를 보며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날은 꽃을 보자 생각이 났다. 납골당에 두려고 무작정 꽃을 샀다.
할아버지는 6.25 전쟁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가족들과 헤어졌다. 생사도 모른 채 이모의 손을 잡고 남쪽으로 내려왔고, 돌아가실 때까지 가족들은 보지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을 눈 빠지게 기다리시고, 살던 곳을 거실 큰 달력 뒤에 그리며 통일이 되거든 가보라고 전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선하다.
할아버지는 나를 많이 사랑하셨다. 손녀 중에서 제일 예쁘다고, 텔레비전에서 내 또래아이가 나와 장기자랑을 선보여도 내가 최고라고 하셨다. 내가 집에 돌아갈 때면 아이스크림 사 줄 테니 다음 주에 또 오라고 속삭이셨다.
언젠가 할아버지와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어둠을 무서워했던 나는 엄마가 곁에 없는 밤이 무서웠다.
불빛이 없는, 나의 공간이 아닌 장소. 잠은 안 오고 시계소리만 크게 들리는 그곳이 무서웠다.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할아버지를 깨게 만들고 신발장 옆 등을 하나 켜고 나서야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괜히 걱정했다. 할아버지가 겁 많은 아이라고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할아버지 화나면 무섭다는데, 엄마도 없는데 날 혼내시면 어쩌지.
할아버지는 아침 식사를 할 때도, 할머니가 왜 등을 켜고 잤냐고 물을 때도 아무 말하지 않으셨다.
함께 산책을 하다 할아버지 손을 잡았을 때야 입을 여셨다.
당신이 가족을 잃었을 때 외로웠던 경험, 공장에서, 식당에서 일하며 무서웠던 일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아온 나날들.
언젠가 어른이 되면 혼자서도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그때까지 할아버지가 등불은 켜줄 테니 용기를 가지라고. 내 손녀는 다 이겨낼 수 있다고.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잡고 걸으며 들었던 그 이야기가 아직 기억난다. 그때는 삐죽거리며 들었던 말들을 이제야 하나씩 이해한다.
생각보다 어른은 더 혼자였다고, 어둠보다 무서운 건 훨씬 많았다고.
세상은 할아버지처럼 등불을 켜고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가끔은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할아버지한테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떻게 견디신 건지, 그때 어떤 감정이었는지 더 알고 싶다. 그렇지만 나의 질문은 쌓인다. 꿈속에서 만나는 할아버지는 말이 없다.
꽃을 보며 할아버지가 떠오른 건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뵙지 못한 나의 죄책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할아버지를 다시 보고 싶은 나의 이기적인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할아버지가 생각나고,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고, 어렸던 내가 할아버지의 아픔과 외로움을 알아주지 못했던 것에 죄송하다.
그날은 더 그랬다. 맥주를 마시고 집에 가며 펑펑 울었다. 꽃도 나도 작아 보여서, 그 예뻐하던 손녀가 지금 어떻게 자라는지 보고 계시는지, 나만 보고 싶은 건지 알 방법이 없어서.
아마도 이게 어른이겠지. 할아버지도 이렇게 살아나가셨겠지 하면서 집에 들어갔다.
오늘도 할아버지가 그립다. 나는 하루를 또 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