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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덕 Mar 23. 2023

4. 계속 찾아오는 이유

연애의 발견

사랑하는 마음에는 관성이 있다고 믿는다.

너무 깊이 사랑했다면, 크게 상처받고 끝을 맺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지난 사랑을 떠올릴 때에는 가슴 뜨겁게 내 모든 것을 주었던 때로 돌아가게 된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짧은 순간일지라도 가슴이 저릿하는 그 순간이 온다.



여름의 곁에는 분명 너무도 좋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다가오는 태하는

가장 순수했던 때, 가장 순수하게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이다.

태하는 그때의 뜨거웠던 여름의 모습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치사한 방법으로 계속해서 여름을 흔들어왔다.


여름이 태하를 미워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헤어진 게 아니라는 말을 하며 태하가 이제 진짜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오히려 여름과 태하는 진정한 헤어짐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여름이는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약자라고 말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연애가 끝나봐야 누가 강자인지, 누가 약자인지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때는 더 많이 좋아했던 쪽이 강자예요. 미련이 없으니까.

나처럼 사랑을 받기만 했던 사람은 후회와 미련이 남잖아요.

그렇게 되면 평생 그 사람을 잊을 수 없게 되는 거거든요.


강자는요, 좋아할 수 있는 만큼 좋아해 보고, 해볼만큼 다해본 그런 사람이 강자예요.

여름이 같은 사람이요. 」


'진짜 헤어짐'을 말하고 여름에게서 멀어지려 했을 때, 태하는 연애가 끝난 후의 약자가 되어 평생 여름을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 후회한다.

사랑을 받기만 했던 것을. 좋아할 수 있는 만큼, 해볼만큼 다 해보지 못한 것을.


그래서 태하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함께 갔던 연리지, 함께 들었던 브라운아이드소울을 꺼내면서 나는 앞으로도 너와의 소중한 추억들을 꺼내볼 수밖에 없는 이별의 약자임을 여름에게 말한다.

잘 지내겠다고 말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잘 지내기 위해 계속해서 여름을 찾아가 바라본다.

태하는 어쩌면 여름이를 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연애할 때 더 좋아하지 못해서

약자가 된 지금에서야 그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잘 좀 지내면 안 돼? 잘 지낸다고 거짓말할 생각 말아. 잘 못 지내는 거 알아.

태하 씨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나도 태하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왜 자꾸 찾아오니?

니 인생 잘살면 됐지 왜 자꾸 찾아오냐구.

그렇게 나를 자꾸 찾아오면, 내가 너를 기다리게 되잖아.

하루에도 몇 번씩 창 밖을 보는 줄 알아?」



태하의 생각은 틀렸다.

사랑할 때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은, 이별한 후에도 감당해야 할 그때의 감정이 너무나 크다.

그 사람이 나와의 추억을 꺼내면 나도 그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알려주고 싶다.

나도 그 노래와 그때 그 나무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너와 찍은 사진들을 아직 버리지도 못한 채 외면이라는 상자 안에 두고 시간이 해결해 주기만을 가디라고 있다고.

여름은 자꾸 찾아오는 태하를 어느새 기다리고 있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여전히 사랑의 약자임을 느낀다.

그리고 태하가 바라는 여름의 행복이란, 결국 태하와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됐을 것이다.

늦은 새벽,

내가 그쪽으로 건너갈 수도, 너를 내쪽으로 건너오라고 할 수도 없는 그 다리에서 여름은 주저앉아 울 수밖에 없었다.



옆에 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감정을 외면하면, 오히려 그 감정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나서야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가장 순수하고 뜨거웠던 20대의 연애만큼 ‘사랑’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그때 그 사람에게 줬던 내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서 똑같이 받을 수도, 똑같이 줄 수도 없는 그때 그 시간 자체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나눈 사람이 다시 사랑의 약자로 돌아와 나를 찾아오고 기다릴 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흔들리는 내 감정에 솔직할 수도, 그 마음을 외면하고 혼자서 행복할 수도 없는 여름을 비난하기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리 도덕적이지 않다.


만약 사랑과 이별의 총량이 있어서 사랑한 만큼 이별할 때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태하의 말처럼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강자가 되어 미련도 후회도 없이 깔끔하게 이별할 수 있다면,

마음껏 사랑하고 모든 걸 쏟아부어도 될 텐데.

하지만 때로는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더 많이 아프기도, 나중에 더 아플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더 꺼내보이기도 하는 그런 불공평한 게 사랑인가 보다.


더 좋아하지 못해서 후회하는 수많은 태하와

어쩌면 그 사람이 날 그리워하며 찾아오길 바라고 있을지 모를 수많은 여름에게,

뜨거운 여름을 보낸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찾아오고 기다리는 이유는 그저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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