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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el Sep 17. 2023

가을의 시선

나는 가을입니다...

참으로 무더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덥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모습이다.

에어컨이나 선풍기의 날갯짓이 멈출 줄 모를만치 사람들은 더위와 싸워가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이어달리기에서 내가 급하다고 미리  가서 그 바통을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다만 그것을 지켜보며 기다릴 뿐.

내 차례가 오면 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지 나를 담금질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그 시간이 오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들어설 틈조차 주지 않던 여름에 조금씩 구멍이 생기는듯하다.

늦여름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를 지나는 즈음에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여름에

조금씩 기운이 빠지는 것이 느껴진다. 여기저기 빈틈들이 보인다.

내 차례가 오면 달려가야지 싶었지만 막상 그 차례 앞에서 나는 겸손해지듯 머뭇거려지게 되었다.

막 달려갈 수가 없다.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일 준비의 시간도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처음의 기분과 달리 속도를 줄여보기로 했다.

아침, 저녁의 기온이 내려가고 창가에 내리는 햇살의 빛깔이 달라졌다는 사람들의 말속에서

나의 속도를 가늠해 본다. 내가 그들 속에 얼마만큼 와 있는 것인지를 느껴보는 것이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더운 여름에서 갑자기 서늘해지는 급변보다 센티해지는 햇살 속에서, 가로수 잎이 조금씩 물드는 속에서,

여름 내내 입던 반팔 티셔츠에 얇은 바람막이라도 걸쳐야 할 만큼의 계절 속에서 나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

여름과 가을의 경계. 그 경계가 무너지면 이제 온전한 나의 계절이 될 것이다.


어제는 모자인 듯 아닌 듯 한.. 커플을 보았다.

2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의 손을 꼭 잡고 산책길을 걷던 중년의 여인.

두 사람은 산책로를 걸으며 연신 수다했다. 아니 중년 쪽에서 쉼을 주지 않고 일방적이었을 것이다.

길가의 은행나무 아래서 멈췄다.

초록색에서 연둣빛으로 색깔이 옅어진 은행잎을 남자에게 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다시 바닥에 떨어진 은행나무 열매를 손으로 만져보고는 냄새를 맡다가

남자에게 내밀어 냄새 맡게 하니 남자는 인상을 구기며 잡아서 저쪽으로 던져버린다.

그 모습을 보고 중년은 크게 웃었다. 사소한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미소 지었다.

여름날 진한 초록잎으로 길을 걷는 이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었던 은행나무는

이제 연둣빛으로 혹은 낙엽으로, 나무 열매로 가을이 오는 소식을 알려주고 있었다.

언제 가을이 왔는지 느낄새도 없이 바빴는데 가을은 다양한 모습으로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한다. 나도 내가 좋다. 내가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 수 있는 시간들이 좋다.

더위로 올라갔던 감정들을 내려주고 더위에 눌려 내려갔던 열정들을 끌어올려 줄 수 있어서 좋다.

작년에 입었던 화려한 색깔 옷들을 다시 꺼내 입으려고 준비하는 나뭇잎들을 보면서 나도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일테지.

내가 여름을 밀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만큼 겨울도 저 멀리서 나를 밀어내려고 애쓰고 있겠지.

작년에는 여름에 눌려 지각했고 겨울의 압박에 못 이겨 나의 가을 열정을 다 쏟아내지도 못했는데

이번에는 여름을 빨리 보내고 온 힘으로 겨울의 진입을 더디게 만들어

사람들이 나의 계절 속에서 충만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증오와 미움, 극한의 마음들이 조금은 여유로워지고 조금은 온화해질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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