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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el Apr 1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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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한 대목....

인환은 오늘도 술로 인해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모습일뿐더러 가족들에겐 최악의 민폐남이다.

인환은 언제나처럼 내일도 그러할 것이다.

본인 안에서 뿜어지는 분노를 그렇게밖에 표출할 줄 모르는 사람.

분노를 세련되게는 아닐지라도 조금은 유연하게 표출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으니까.

'퍼뜩 가서 술 안 받아오나? !'

'내가 몬산다 몬살아으이고내 팔자야귀신들은 다죽어삣는지...저 인간 안잡아가고'

낮부터 술에 절어 가족들을 학대하는 남편을 보는 정순은 팔자 운운하며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한창 파종도 하고 논밭 일거리도 쌓여있건만 한낮부터 한잔 두 잔 마신 술이 해 질 녘쯤에 저 모낭을 만들어

내는 인환을 보는 정순은 울먹이면서도 아이들 생각에 마지못해 마음을 달래 본다.

그러면서 또 큰딸을 점빵으로 보내고 만다정순이 가려해도 어린아이들에게 행패 부릴까 걱정되어

집을 비우지 못하고 애먼 큰딸만 동네점빵 단골을 만든다.


 술기운이 뇌에 차오르면 인환은 반복되는 레퍼토리처럼 그날을 떠올린다.

그때 마누라 말을 조금만 들을걸.

애걸복걸하는 정순을 뿌리치고 친구한테 소를 담보로 빛을 내준 것이 화근이다.

한 동네에서 수십 년 흙을 파 먹고살던 정섭이가 그렇게 야반도주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부모한테 물려받은 재산 없이 몸뚱이 하나로 일구고 다듬어서 마련한 전재산인 소를

그 친구로 인해 조합에 넘길 때의 피 토하는 그 심정은 아무도 모른다.

인환은 그 뒤부터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다서른까지 술이라고는 입에 대어 보지 않고

죽자고 일만 해온 인환은 쓰디쓴 그의 인생만큼 쓴 술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이 타는 줄도 모른 채 소주 다섯 병을 비우고는 그대로 쓰러져버렸다인환의 술은 그때부터였다.

그동안 술을 참아온 것인지 진짜 그때부터 술이 인환을 찾아온 것인지 모를만치 하루도 빈날 없이

인환은 서서히 술에 중독되어 갔다.


소를 마련했을 때를 떠올렸다.

막내아들까지 다섯과 정순여섯 식구의 목숨이 인환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하루도 허투루 살 수 없다는

다짐이 매일 인환을 논으로, 밭으로 보냈다.

그렇게 흙에 파묻혀 사는 동안 정순의 알뜰살뜰한 살림살이 덕에 제법 반듯한 소를 장만한 것이었다.

가족끼리 소소한 잔치를 벌였다그때부터 더 열심히 흙을 팠다.

한데 어느 때부터인가 정섭이가 본인 일도 바쁠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 도장을 찍었다.

워낙 오래된 한동네 지기라 추호의 의심도 없이 친구의 정을 나눈 것이다.

그날도 아침나절 논에 다녀갔는데 저녁 숟가락 놓을 시점에 또 방문한 것이다.

근근이 장만한 초가집쪼만한 두 칸 방 하나에 밥 먹은 상과 정순을 물리고,

긴히 할 얘기가 있다는 정섭이와 마주 보고 앉았다오랜 친구인데 왠지 낯선 사람을 대면한 기분이다.

짧은 시간의 침묵정섭이도 불편한지 첫말을 내뱉기 전에 킁킁’ 강아지 기침으로 어색함을 물리치려 한다. ‘고마 뺑 안 두리고 바로 말하께’, ‘돈이 쫌 필요하다아들(아이들외삼촌이 잽혀간다꼬 한다.

인환아! 좀 살리도니가 아니모 내가 누한테 말하끼고일만 잘 해결되면 내 금방 갚을끼다

정섭은 울먹이듯 인환의 손을 잡고 무릎이라고 꿇을 기세다.

정섭이 손위 처남은 부산인가 어디서 사업을 하는데 돈을 잘 번다고 매번 자랑질을 해서 염장을 질렀는데

그놈이 잽혀간들 내가 무슨 상관이냐 싶기도 했다.     

니도 알다시피 내가 돈이 어딨노근근이 땅 파묵고 사는 거 니도 빤히 알면서’ 돈이 없다는 인환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매달리는데밖에서 들었는지 정순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서 밤이 늦었다고 알리니

정섭은 민망한지 줄행랑치듯 돌아갔다.


죽어도 안되다이묵꼬 죽어라 캐도 돈이 어딨노 돈이’, ‘돈 있으모 내가 먼지 쓰고잡다’,

숙이 아부지도 함부레 딴생각 마소’ 정섭이 돌아가자 정순이 절대 안된다며 걱정 찬 말들을 쏟아낸다.


그렇게 끝난 일인 줄 알았는데 정섭은 그 뒤로도 질질거린다급기야 소 이야기까지 나온 것이다.

처남 자랑질로 염장 질렀던 일은 차츰 옅어지고 친구의 절절함이 더 크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열 번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인환이 딱 그 짝이 된 것이다.

울며불며 말리는 정순을 뒤로하고 언제일지도 모르고,

일이 잘 해결 안 되면 우짤낀데?’ 라는 정순의 말림도 무시하고 일만 잘 해결되면 곧 갚을끼다라는

정섭의 말만 크게 듣고 인환은 소를 담보로 조합에서 피 같은 돈을 내어준 것이다.

정섭은 인환에게 돈을 건네받으면서 수십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한다.

친구야! 진짜 고맙다. 내 이 은혜 팽생 안잊으끼다!’ 인환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또 숙인다.

정섭은 뒤에 엉거주춤한 채로 고개 숙이고 서 있는 아내 만숙을 힐끗보더니 품속에 돈을 넣고는

함께 사라진다정섭의 얼굴을 본 것은 그것이 끝이었다.


다음날 아침 정섭의 집이 텅텅 비었다는 소문이 돌았다한동네라 해도 인환의 집과는 끝과 끝인 셈인

정섭의 집 소식은 소문이 먼저일 때가 종종 있기도 했다.

한데 오늘 아침도 소문이란 놈이 먼저 인환에게 당도했다.

내 눈으로 봐야겠다며 정섭의 집에 도착한 인환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내 돈내 돈 내놔!’ 아무리 소리 지르고 발악해도 돌아오는 건 따뜻한 봄바람뿐이었다.

정섭을 찾는다고 읍내고 어디고 일을 팽개치고 돌아다녔다.

처남이 산다는 부산을 헤맸지만 남은 건 뒤늦은 후회가 동반한 허탈과 치오르는 분노 뿐이었다.

소식조차 듣지 못한 인환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이후 원금과 이자를 제때 갚아주지 못하니 조합에서는 일꾼들이 와서 생때같은 소를 잡아갔다.

온 가족이 폭탄 맞은 것보다 더 난장판이 된 것이다.     


쨍그랑!’

인환은 그때의 기억이 또다시 뼈에 사무치는지 입에 붙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퍼뜩 술 안 갖고 오나?’

애먼 가족들에게 빈 술잔을 집어던진다.

술을 쳐묵을 라모 곱게 쳐묵던지!’

정순의 악다구니는 인환의 잠들지 못하는 분노를 넘어서지 못한 채 허공으로 퍼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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