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에 참가하는 이유
팀 매니저 한 분이 오는 6월을 마지막으로 퇴직을 하게 되었다. 그 기념으로 회사에서 한 정거장 차이의 한국 음식점에서 회식을 했다. 결혼, 요리, 술 등 오만가지 주제의 이야기가 오갔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 이야기의 절반은 알아듣는 척을 하느라 바빴다. 난 내가 회화 실력이 좀체 늘지 않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거기엔 단순하지 않은, 나름의 경험적 분석이 반영되었달까. 갑작스러운 현실 자각에 글을 써 본다.
1. 이론 위주의 학습이었기 때문에
학생 시절 내 손때가 묻은 노트는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친구들에게 참고 자료로 사용되었던 요물이었다. 그게 없으면 공부를 못 한다는 생각에 뭐든지 노트로 정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교 때 일본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해서도 줄곧 펜과 종이와 교재를 사용했다. 그게 모든 학습의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단어 테스트를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4-60점을 맞아도, 애써 암기한 끝에 항상 만점에 가까웠던 나보다 현재 일본어를 훨씬 잘 구사하고 있다.
2. 인풋보다 아웃풋이 적기 때문에
1과 비슷한 내용이다. 외운 걸로 끝내버린 탓에 어디에다 적용해 보는 데는 한참 부족했다. 애초에 말수가 많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할 말을 생각하는 성향적인 특성도 그 이유가 될 것 같다. 일본어를 잘 구사하고 있는 그 사람과 나의 다른 점은 '틀려도 그냥 말해 보는 것'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이다.
3. 모국어를 구사할 때의 버릇이 그대로 옮겨지기 때문에
한국어로도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편이다. 말하는 와중에도 수많은 경우의 수를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기분 상하지 않게 말해야지.', '이 상황엔 어떤 단어를 써야 쉽게 이해할까.'라며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상대방의 미간을 찌푸린 얼굴을 보면서 최적의 말을 선별해 낸다(참 복잡하게 사는 편). 이런 습관이 그대로 일본어를 구사하는 데 옮겨져 더군다나 알고 있는 단어만으로 조합을 하려니 더욱 힘든 것이다.
스스로에게 현실 자각을 시키고 팩트 폭력을 행하니 내가 부족하긴 하구나 하고 현재 수준을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학습 방법을 반대로 하면 회화 실력이 조금이나마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펜과 종이는 집어던지고 직접 입으로 내뱉고 직접 귀로 듣는 상황에 노출시키기, 문법이 틀린 것 같아도 머릿속에 필터를 느슨하게 하여 아무렇지 않게 말해보기 등이 있을 것이다.
언어는 재밌지만 어렵다. 전날 애니메이션에서 습득한 단어 하나를 몇 번이나 되뇌어도 막상 회식자리에서 말하려고 하면 엉뚱한 단어를 말해버리기 일쑤이다. 사람의 기억력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듣고 본 단어를 그새 잊어버렸다는 게 스트레스로 다가올 때도 있다. 그래도 이젠 잊어버리는 이유가 한 번만 들었기 때문에, 한 번만 보았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 답은 정해져 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어떠한 단어를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구나,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는구나 하며 여러 번 경험한 뒤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머릿속에 정착시킬 수 있다.
언어를 배우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성취는 이런 게 아닐까? 그렇게 정착된 언어 하나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내뱉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론이 아니며, 아웃풋이자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기본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