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실 건물 안으로 비둘기가 들어왔다. 내가 들어가야 할 열람실 입구 앞에 떡하니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둥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너무나도 평온하게 분리수거 박스에 안착해 있었다. 어쩌다 이 칙칙한 독서실 건물 안까지 들어오게 된 것일까. 이유야 뭐가 됐든 나는 어서 열람실로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무작정 들어가다가 갑자기 푸드덕대며 나에게 날아온다면 기절이고 도망치기에도 통로가 너무 좁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였다. 아침부터 서둘러 부랴부랴 노량진까지 왔는데 이 비둘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비둘기에 비해 몇십 배 더 큰 몸뚱이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었다.
나는 비둘기를 무서워한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를 빨간 눈은 흐린 눈으로 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절대 자세히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묘하게 빛나는 목 부분의 초록색 털도 너무 싫다. 앞뒤로 고개를 움직이며 걸어 다닐 때 초록빛 털이 더 반짝이는데 그럴 땐 더 징그럽다. 평화의 상징이라는 것도 옛날의 옛날의 옛날 말처럼 전혀 와닿지 않는 표현이다. 떼 지어 몰려다니며 길바닥에 있는 쓰레기들을 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평화를 떠올리기엔 많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역시 평화보다는 유해조수 쪽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물론 징그럽게 생겼다고 유해동물이 된 건 아니지만 말이다.
언제부턴가 길가나 공원에 걸려있는 현수막에서 꽤나 자주 발견하게 되는 문구가 있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사람이 주는 먹이에 비둘기들이 몰릴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개체수 증가와 그에 따른 배설물에 의한 오염 등의 문제를 만들 것이라는 게 이유이다. 비둘기들이 글자를 읽을 리 만무하지만 이 사실을 안다면 꽤나 슬프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길에 널려있는 먹이를 먹고 살이 잔뜩 쪄 정말 닭 같은 모습으로 날지도 않고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비둘기들이 많은 것을 보면 비둘기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겠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이게 비둘기인지 닭인지 애들 상태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아침부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비둘기가 무서워 비둘기를 피하려다 비둘기 생각을 이어가는 내가 조금 웃기게 느껴지던 순간 맞은편 거울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뒤뚱거리며 걷는 닭둘기를 욕할 처지가 아니네.’
아점으로 몸속에 집어넣는 햄버거와 운동이라고는 독서실에 앉아서 다리 떠는 정도가 전부인 하루 루틴들이 매일같이 쌓이니 해가 갈수록 체중은 점점 늘어났다. 수험 생활 기간과 성적은 슬프게도 항상 비례하지는 않았는데 얄밉게 체중만큼은 꼭 비례해서 증가했다. 합격만 한다면 당장 다이어트를 시작할 거라고 매번 거울을 보면서 다짐했는데 그 다이어트는 시작점이 어딜지도 까마득해졌었다. 정말 이렇게나 길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었으니까.
내 주변 사람들만큼이나 부모님의 주변 사람들도 나의 소식에 대해 많이 궁금해했다. 2년까지는 다들 그 정도는 준비하니까 조용했지만 그 이후부터 한두 마디씩 나왔던 것 같다. 계속 그렇게 공부하게 둬도 되는 것이냐, 지원을 다 끊어봐야 정신 차리지 않겠냐는 조언과 훈수 그 어디쯤의 말들 말이다. 처음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순간 울컥 화가 올라왔다.
“나 문제집 한 권이라도 사주고 그런 말 하라고 해.”
물론 엄마가 이런 말이나 듣자고 굳이 나에게 전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너를 믿고 있으니 좀 더 열심히 해주길 바란다는 마음에서 한 말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그 당시의 마음에는 어깃장부터 나가버렸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말이라는 건 참 쉽게 뒤집힐 수 있는 가벼운 것이다. 5년을 불합격으로 보낸 후에는 “2년 해보고 안 됐을 때 딱 관뒀어야 했어. 그 이후로 버린 시간이 몇 년이니? “라는 말은 맞지만 일 년 더 하고 합격했다면 ”그때 다 관둬버렸으면 어쩔 뻔했어. 잘 참고 일 년 더 해본 게 잘한 일이지. “가 맞을 것이다. 후자가 엔딩이었으면 참 좋았을 것을 결국 나에게 돌아온 말은 전자였다.
5년의 수험생활을 청산하고 나는 잔뜩 무거워진 실패를 부채처럼 떠안게 되었다. 이것이 나를 더 슬프게 한 이유는 내 실패가 부모님의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한 것이라고는 나를 믿고 지지해 준 것밖에 없었지만 나의 불합격은 그 믿음을 오히려 자식을 망친 그릇된 것으로 평가받게 만들었다. 그것은 타인의 말에서 시작되어 정말 그것이 원인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수험 과정도 그로 인한 결과 모두 나에게서 원인이 있는 것인데 말이다. 자식을 말리지 않고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지 않았다는 잘못이 꽤나 오랜 기간 동안 부모님을 괴롭혔던 것 같다. 아니 지금까지 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실패자인 동시에 불효자도 되었다. 부모님의 생태계 안에서 믿음이라는 먹이를 잔뜩 받아먹고 배설물만 남긴 유해조수나 다름없었다.
내 인생에 더 이상의 공무원 시험은 없다며 완전 포기를 선언한 이래로 나는 이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솔직히 아주 조금 스치듯이 후회해 본 적은 있긴 하다.) 하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딸의 도전을 지지해 준 선택에 대해 비난했던 사람들에게 “그래도 역시 내 딸이 해낼 줄 알았어.”라며 신나게 멋진 응수를 둘 기회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렇게 만들어버린 내 과거를 탓이라도 하지 세상에 짜잔 하고 등장했는데 나오자마자 유해동물이 되어버린 비둘기의 삶은 꽤나 억울할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징그럽게 느껴졌던 비둘기에서 동질감을 넘어 동정심까지 느껴졌다.
그렇게 부모님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평균 사회초년생 시기를 훌쩍 넘긴 나이에 가진 것이라고는 노량진 엉덩이 싸움 경력밖에 없는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니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잃은 것이 맞겠다. 어느 하나 간단한 것이 없고 쉬운 것이 없다. 나는 아직도 방황하며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스스로 먹이를 찾아 생태계의 당당한 일원이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