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ma Jul 23. 2023

[엄마, 안녕] 19. 뻔한 말


"난 그런 세월을 살았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나 죽으면 아무것도 하지 마."


오빠한테 엄마는 화장을 해달라고 했단다.

화장을 하라고 한 죽어서 아빠 옆에 묻히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지만, 자신 때문에 자식들이 고생할까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5년이 넘었다.

해마다 오빠는 아빠의 산소로 가서 벌초를 했었다.

한식에 한 번 가고 추석에는 집안 벌초를 하러 선산에 갔다가 오빠 혼자 따로 날을 잡아서 아빠 산소 벌초를 하러 갔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늘 아까운 아들 닳을까 걱정이었고, 아들이 다칠까 걱정이었다.

그런 아들이 자신 때문에 땡볕에서 벌초하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다. 또 화장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져서 엄마도 화장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없었을 것도 같다.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던, 생각만 해도 싫은 남편이었다. 하지만 혹여나 자식들 잘못될까 싶어, 자식들 잘 살게 해 달라는 마음으로 엄마는 25년이 넘게 제사를 준비했었다.

그렇지만 당신의 제사는 지내지 말라고도 했었다.


부모가 죽으면 양지바른 곳에 잘 모시고, 제사를 잘 지내드리는 것이 당연했던 삶을 사셨는데, 자기한테는, 그리고 자기 죽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진심이었을까? 

자식들한테 짐이 되는  싫다고 했었고,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하는 것도 싫다고 했었으니, 진심도 조금은 섞여 있었을 것 같다.


우리는 엄마의 말을 진심으로 들었고, 화장을 했다.

엄마의 작은 몸이 더 작은 유골함에 담겼다.


유골함을 안치단에 넣던 날,  납골당 직원은 삼우제 때 안치단을 다시 열 수 있는데, 그때 안치단에 넣을 편지를 써오면 좋다고 조언을 해줬다.


편지......

엄마한테 편지를 쓴다는 게 너무 낯설었다.

살면서 엄마한테 딱 한 번 편지를 썼었다.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 짐 정리를 하다가 옷장 속에 있던 편지를 발견했다.

23년 전 어버이날에 쓴 편지였다.

편지를 읽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반말로 쓴 편지였고, 엄마가 준 용돈으로 엄마 옷 선물을 샀다고 예쁘게 입으라고 쓰여 있었다. 제대로 된 돈벌이를 못하고 꿈을 좇던 시절이었다.

엄마가 글을 잘 못 읽어서 내가 쓴 편지를 엄마한테 읽어줬던 기억도 있다.

궁핍한 살림에 도움을 줄 생각보다는 막연한 꿈을 좇는 딸애의 편지를 읽고, 아니 듣고 엄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엄마는 그 편지를 버리지 못하고 옷장 속에 넣어뒀던 모양이었다.



어릴 때 신사임당도 이순신도 에디슨도 존경한다고 말하지 않았었다.

가정형편상 위인전 같은 건 집에 없어서 학교에서 들은 것이 전부였기도 했지만, 그 위인들은 나의 불안하고 위태롭던 어린 시절에서 너무 멀리 있었다. 그래서 확신에 차서 누군가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었다. 머리가 굵어질 나이가 됐을 때, 난 처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생겼었다.

엄마였다.

엄마의 희생과 무한한 책임감과 성실함.

그래서 난 엄마를 존경한다고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고 다녔었다.

정작 엄마한테는 말한 적이 없지만......




내가 아주 어릴 때, 엄마는 나를 업고 언니와 오빠 손을 잡고 밤에 산을 올랐다고 했다.

죽으려고.




엄마는 감을 좋아하셨다.

잘 익은 감나무를 보며

'꽃 같다.'

말하며 보는 것도 좋아했고, 감을 먹는 것도 좋아했다.

겨울에는 대봉을 한 상자 사서 잘 후숙 시켜서 먹기도 했고, 단감도 좋아하고 홍시도 좋아했었다.

엄마 어릴 때,

외할머니는 엄마가 눈에 안 보인다 싶어 찾으면 높은 감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따 먹고 있더라고도 했다.

그렇게 천방지축이고 세상 걱정 없던 엄마는 농사짓고 바느질해서 옷 만들어 입는 것이 전부였었다.

그런 엄마가 결혼해서 낯선 서울에 아빠 따라왔는데, 아빠는 사업이 망했다고 매일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고 당장 먹을 것도 없으니, 고작 30대 초반인 세 아이의 엄마.

그 여자는 얼마나 막막했을까.


얼마 전 선배언니와 이야기를 나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자신의 삶이 무너진 듯 슬픈 게 너무 화가 난다고 했었다.

어릴 적 부모님이 이혼해서 할머니 손에 자랐던 선배언니한테는 할머니가 엄마였었다. 그러니 할머니의 죽음은 선배언니한테는 엄마의 죽음과 다르지 않았었고, 그런 슬픔을 갖게 한 자신의 부모님한테, 엄마한테 화가 난다고 했었다.

그 선배와 할머니 얘기를 했었다.

어린 날, 송충이가 선배언니 몸으로 떨어져서 너무 놀라 할머니한테 떼어달라고 소리치는데, 할머니도 송충이를 너무 무서워하며 한참을 허둥대다가 송충이를 떼어줬었다고 했다.

그때는 무슨 할머니가 송충이를 무서워하냐고 짜증을 냈었지만, 나이 들어 생각하니, 할머니도 송충이를 무서워할 수 있는 여자,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엄마의 손을 잡고 산 길을 걷던 언니는,

'살고 싶다.'

했단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우리 3남매를 데리고 내려오셨다고 했다.

이후, 엄마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라이터공장, 다방, 식당. 그리고 오랫동안 페인트공으로 일하셨었다.

새벽밥을 지어 우리에게 먹이고 일을 나갔었고 저녁 늦게 들어와서 다시 밥을 차려 저녁을 먹였었다. 그래도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날은 다행이었다. 아빠는 거의 매일 술을 먹고 들어왔고, 엄마한테 밥상을 차리라고 큰소리를 치고 나서 차려진 밥상을 뒤엎어버리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새벽까지 아빠와 싸우고, 아빠한테 맞다가 다시 새벽에 일을 나가기도 하셨었다.

그런 모진 세월을 사셨다.

우리 3남매 때문에.


엄마나 선배의 할머니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하고, 무서운 것을 극복해야 하고, 온 힘을 다해 삶을 견뎌내야 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평생을 자식을 위해서, 자식 걱정만 하다가 가신 엄마한테 어떻게 편지를 써야 할지 난감했다.

할 말이 너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상황에 적절한 표현이 없는 거 같기도 했었다.

결국에는 편지를 안치단에 넣지 못했다.

계속 고민하다가 결국 내가 엄마한테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해요.

고마웠어요.

사랑해요.


이 말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겠다.


엄마가 내 엄마여서 고마웠어요.

고단했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줘서 고마웠어요.

내가 제일 존경했던 사람은 엄마였어요.


엄마,

많이 아프게 해서,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요.


엄마,

사랑합니다.

사랑한다고 자주 말해주지 못해서 후회가 너무 커요.


엄마,

보고 싶어요.


                     

작가의 이전글 [엄마, 안녕] 18. 엄마, 안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