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이란 언제나 완성만을 염두에 두면서 창작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태도야. 그러나 순수하고 진정으로 위대한 재능은 창작과정에서 가장 커다란 행복을 누린다네. 로스는 염소와 양들의 모발과 털을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그렸는데, 그 끝없이 세세한 묘사에서 우리는 그가 작업을 하는 동안 너무도 순수한 행복감을 누렸을 뿐, 완성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네.
그러나 재능이 시원찮은 자들은 예술 그 자체에 만족하는 일이 없어. 그들은 창작을 하는 동안에도 완성된 작품이 가져다주리라고 예상되는 이득만을 눈앞에 그리고 있다네. 하지만 그러한 속물적인 목표와 방향으로부터는 아무런 위대한 것도 생겨날 수가 없겠지.
-괴테와의 대화
오늘 아침 내리는 이 비를 끝으로 가을은 종식될 것이다. 빗물에 떠밀려 쌓여가는 나뭇잎의 모습은 폭염이 가을의 시간까지 먹어 치운 흔적으로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가을매상을 놓친 대형매장들은 서둘러 성탄절 특수를 일찌감치 꺼내 들며 본전을 찾겠다는 기세다.
계절이 바뀌는 것에 민감한 편은 아니지만 가을이 지날 때 나는 한 해를 돌아보는 습관이 있다. 탁상달력을 무심히 넘겨 보기도 하며 놓치지 않도록 메모했던 나의 집착과 함께 그날의 일상들이 떠오르는 차분한 나만의 의식을 치른다. 함축된 메모의 흔적 속에서 한 해 동안 달려온 우리 가족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매 순간 닥친 자신의 일상에 최선을 다하며 성장한 모습이 보여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난다.
성장은 단순히 속물적인 목표달성에 있지 않다. 성장은 오히려 실패의 과정 속에서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장점과 인생의 방향성을 찾는 과정이다. 귀한 시간이지 좌절로 낭비할 의미가 없다. 반복의 힘을 믿어야 한다.
정약용 선생은 당구첩경법(當求捷經法)이라 하여 최선을 다해 바른 길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셨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서 요행과 유혹에 빠졌던 과거의 덜미에 잡혀 인생 망치는 고위 공직자들을 우리는 많이 보았다. 지루하게 보이는 반복의 바탕을 많이 다질수록 기초가 튼튼할 수밖에 없고 디테일한 지식으로 인해 내면의 자신감이 충만해진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의 위치에 걸맞은 생각과 행동을 갖추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역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본분을 아는 것과 같다. 교수라면 교수의 역할, 관공서에 종사한다면 관공서 업무에 있어서 해박한 지식과 행정업무, 학생이라면 학생의 본분일 것이다.
자신의 업(業)에 대한 자부심은 내가 원하는 일상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 밑받침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과 본분을 잊은 것도 부족해 삶을 지겨워한다. 자신이 변하려 노력하지 않으며 환경 탓을 하며 매너리즘에 빠진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면 젊은 생각을 가지고 살도록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젊은 생각이란 순수한 마음으로 일상을 바라보는 관찰력이다. 매 순간의 과정에서 어제보다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며 기쁨과 성취감을 느끼는 삶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뇌는 효율적으로 일한다. 눈이 전해주는 수많은 장면을 모두 처리하지 않고 똑같은 정보를 압축해 계속해서 들어오는 정보의 차이만 기억하는 것이다. 뇌가 가진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차이를 본다는 점이다. 우리가 살면서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은 이러한 뇌의 기능 때문이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을 반복하다 보면 인생에 변화가 없기 때문에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한 뇌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변화 없는 인생을 느끼는 뇌는 자신의 인생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느낌을받음으로써 우리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삶의 마지막 힘은 결국 혼자서 하는 힘이다. 누군가의 도움은 말 그대로 도움일 뿐이고 자신의 의지를 통해 이루려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때 필요한 것은 차분한 관찰력과 지루함을 견뎌낸 인내심이다. 여유를 가지고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깊이 있게 통찰하려는 힘은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실패가 두려워, 상처가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곤 어제와 똑같은 일상이라 지겹다고 투덜 된다. 실패란 오차 범위만큼 모자란 성공이다. 그 오차 때문에 자꾸 넘어지겠지만 그 '실패 에너지'는 쌓여 넘어지지 않는 마음근육으로 내일을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