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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사람 죽이는 방법

이길 수 없다면 정성을 기울여라



미운 사람을 죽이는 아주 틀림없는 방법이 여기 하나 있습니다.


옛날에 시어머니가 너무 고약하게 굴어서 정말이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던 며느리가 있었어요.  사사건건 트집이고 하도 야단을 쳐서 나중에는 시어머니 음성이나 얼굴을 생각만 해도 속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지경이 되어 버렸어요.  시어머니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는 위기의식까지 들게 되어 이 며느리는 몰래 용한 무당을 찾아갔어요.  


무당은 이 며느리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비방이 있다고 했지요.  눈이 번쩍 뜨인 며느리가 그 비방이 무엇이냐고 다그쳐 물었죠.  무당은 시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어요.


며느리는 “인절미”라고 했습니다.


무당은 앞으로 백일동안 하루도 빼놓지 말고 인절미를 새로 만들어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인절미를 드리면 시어머니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어요.  며느리는 신이 나서 돌아왔습니다.  찹쌀을 씻어서 정성껏 씻고 잘 익혀서 인절미를 만들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처음에는 "이 년이 곧 죽으려나, 안 하던 짓을 하고 난리야?” 했지만 며느리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보기 싫던 며느리가 매일 새로 몰랑몰랑한 인절미를 해다 바치자 며느리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게 되어 야단도 덜 치게 되었죠.


두 달이 넘어서자 시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는 며느리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이 되어 동네 사람들에게 해대던 며느리 욕을 거두고 반대로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게 되었더랍니다.  


석 달이 다 되어 가면서 며느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야단치기는커녕 칭찬하고 웃는 낯으로 대해 주는 시어머니를 죽이려고 하는 자신이 무서워졌어요.  이렇게 좋은 시어머니가 정말로 죽을까 봐 덜컥 겁이 났습니다.


며느리는 있는 돈을 모두 싸들고 무당에게 달려가 "내가 잘못 생각했으니 시어머니가 죽지 않고 살릴 방도만 알려 주면 있는 돈을 다 주겠다"며 무당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렸죠.  무당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미운 시어머니는 벌써 죽었지?”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글이다.  어디서 읽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오래된 글이지만 각오를 다지기 위해 필사해 놓았었다.  당시 시어머님과의 갈등으로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뜨끔하기도 하고 깨달은 바가 있어 마음을 다잡고 내 본분에 충실하자 마음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편향된 생각으로 살아간다.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과 신념도 사실 편향된 생각이다.  여자들이 시어머님과 잘 지내는 데 정해진 모범답안은 없다.  단지 나와 다른 가치관을 존중하며 정성을 기울여 보자고 마음을 먹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시어머님과 30십여 년을 함께 살았고 영면하신 지 어느덧 6년이 다 되어간다.  어머님은 편향된 생각이 강하신 분이셨다.  똑같이 산업전선을 달려도 남편은 평생직장이고 나는 언제고 때려치울 수 있는 구멍가게로 인식하셨다.  파김치가 되어 퇴근을 해도 저녁쌀 하나 씻어놓지 않으셨다.  부엌은 며느리의 일터였다.


힘들다는 표현을 하면 당신 몸이 아픈 사연을(자식들을 키웠던 고생담) 곱절로 풀어놓으셔서 입을 다물게 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결혼초부터 시작해 끝없이 이어졌던 시집식구들의 뒤치다꺼리였다.  어머니와 함께하니 집안의 경조사 책임은 우리 차지였고, 속 썩이는 자식들로 미칠 지경이었다.  마치 난 남편과 결혼한 것이 아니고 시댁식구들의 사후관리를 위해 시집온 일꾼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출가한 자식내외 및 손주들을 모두 불러 생일상을 거하게 받으셨다.  인원이 인원인지라 외식은 꿈도 못 꿨고 나는 1박 2일을 꼬박 부엌이라는 전장에서 고군분투하듯 일했다.  열일한 손가락이 얼얼해 다음날 출근하면 부들부들 손이 떨렸다.  그럼에도 나는 힘을 내야 했다.  어머님을 미워하기가 무서웠다.  글의 힘이었다.




40십에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시어머님의 앞에는 다섯 아이가 남겨져 있었다.  어머니에게 고단함은 운명이었다.  남편은 10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결손의식 속에서 자랐다.  자식의 교육과 성장을 어머님이 전적으로 맡게 되면서 어머니의 고단함은 거역할 수 없는 존재감과 위대함으로 자식들에게 자리하며 성장하게 된다.  특히 효자였던 둘째 아들인 남편을 어머님이 최종 안식처로 선택하신 것은 안전한 노후의 결정이셨을 테다.


어머니의 인생에 대한 완벽한 보상을 위해 나는 착한 며느리여야만 했다.  수많은 내면의 갈등과 불합리성이 느껴져 내면의 반발로 시끄러웠지만 표출은 어려웠다.  남편은 착하고 효자였고 어머니는 몇십 년을 보따리장수로 생계를 끌어온 노련한 달변가였다.  이길 수가 없었다.


어차피 굴복해야 한다면 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온 감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만약 남편이 어머님을 미워하게 만든다 한들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지 않았다.  어머님을 용서하기로 했다. 용서만큼 상대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방법이 없다지 않는가.  


어머니를 이해할 논리를 찾아야 했다.  남편의 역할까지 책임지는 무게감은 단지 용기만으로는 부족한 삶이었을 것이다.  불완전한 삶 속에서 살아온 어머님은 노기는 풀 곳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  정성을 다해 보자.  노기를 풀어 들이자.




정성을 다한다는 것에 대한 태도는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는 최선을 의미한다.  무엇을 드셔야 소화가 잘 되는지, 어떤 옷을 선호하는지, 휠체어를 몰 때 어느 정도의 속도로 가야 편안해하시는지 아는 것이다.  정성스럽게 대하는 마음은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얼굴표정이 저절로 부드러워졌다.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감동하기도 하고 때론 매우 격하게 화를 내기도 한다.  정성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에 이르면 주변에 감사하게 된다.


어머니는 영면하시기 2년 전부터 급속도로 쇠약해지셨다.  더욱 나의 도움이 절실하셨고, 케어를 끝까지 책임지는 내게 마음을 모조리 여셨다.  병원을 이곳저곳 분주히 케어하며 정성을 다하는 나를 향해 다섯 자식보다 훨씬 낫다고까지 하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조문으로 온 요양사님께서 천사 같은 며느리라며 자랑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이야기가 떠올라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와 다시 생각해 보니 내 운명은 어떤 경로의 경험이든 소중한 결과로 채워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기억하지 못해도 어머님은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당신에게 최선을 다했던 시간들을.  어느 날인가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도 우리들 곁에 남아 지켜주시겠노라 다짐하신 것이 기억난다.  나는 그것이 어떤 의미이든 그 말씀만으로 만족한다.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는가?  죽도록 정성을 다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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