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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어휘

서가에 꽂혀 있는 고전에 바람을 불 때


"자막은 가운데를 잡은(執中) 자였다.  가운데를 잡은 것이 도에 가까워 보이기는 하지만, 가운데를 잡고 저울추로 무게를 저울질하지 않으면 결국 한쪽을 붙잡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중용이란 기계적 중립이 아니다. (맹자 진심상 盡心·上)




중국 고전 속 낱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시대적 질문들을 흥미롭게 풀어준 책을 만났다.  현재의 관점에서 고전을 재미있게 비튼 것이다.  서가에 조용히 묻혀 있는 고전을 이렇게 흥미롭게 풀어준 책이라니 저자의 고전 이야기의 새로운 해석이 즐겁게 읽힌다.  



문득 자연스럽게 읽히고 이해되는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한자의 어원을 고전 이야기로 풀어 해석하는 방식에 그치지 않고 현대인들에게 상식이 된 통계나 과학, 인류학, 신화학등 다양한 분야를 접목하는 노련함 때문이었다.  자연과학과 인간을 대비해 새롭게 인문학 어원을 찾아가는 방법은 지적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함축된 단어와 문장 속에 감춰진 이야기와 어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미쳐 놓치고 있었던 중국 고전의 진리와 지혜가 있다.  우리가 고전을 어렵고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행간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동서양의 인문학이란 사실 고전에 대한 주석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며 자주 인용하는 한자의 진정한 의미와 유래를 설명해 주는 스승을 만난 기분이다.



저자는 유교 윤리의 핵심 이념이며 보편적인 지혜와 통찰을 담고 있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보다 당장 절실하게 필요한 현대인들의 질문(단어)들을 추려내어 중국 고전을 해석하고 독자들과의 연결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질문에서 출발해 도착한 고전 독법책이다.



책에는 현대 사회의 화두 32가지 단어(태도, 관계, 가치, 함께함)를 중심으로 글자의 어원과 그에 얽힌 고전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정치의 사법화가 만연해진 혼돈의 정치 속에 한국 사회의 걱정이 심각한 요즘 고전에서 덕치(德治)의 강조함은 현실의 문제점을 정확히 설명한다.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면 상대는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힘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여긴다. 덕으로 남을 복종시키면 상대는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진실로 따를 것이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




공자는 법을 앞세워 협박하는 것으로는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말했다.  덕을 갖춘 군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온다는 뜻이다.  군자의 덕풍(德風)이 불어오면 백성들은 누운 풀처럼 순종하지만, 강압적인 힘(法力)으로 누르면 풀은 일어서 맞설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공자와 맹자에 편견이 사라진 것은 큰 소득이다.  그들은 노자와 장자처럼 모나지 않고 원만하게 세상과 어울릴 여유가 없었다.  정치에 있어서 '중도'라는 말로 자신들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특정 집단의 이해를 반영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당파적인 선의 기준을 가지고 있듯이 비당파적이라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공자는 그럴싸한 화려한 말(교언 巧言)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상황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그때그때 바꾸는(영색 令色) 사람 가운데 어진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자신의 당파성에 솔직하지 않은 위선적인 태도를 꼬집었다."



둘 다 먹을 수 없다면 생선은 포기하고 곰 발바닥을 먹겠다.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전통 사회의 존경받는 군자들은 근엄한 표정으로 중립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하는 군자에게 적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현대로 비유하자면 권력과 자본에 굴복하지 않고 동일한 태도로 세상의 불균형을 잡아주는 언론의 역할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계적 중립을 택하는 언론은 본질을 잃은 허상의 언론일 뿐이다.  저널리즘의 본질적 역할이 중요하다.



"리 매킨타이어는 미국의 기성언론이 균형 잡힌 보도를 해야 한다는 기계적 중립을 고집하다가 결국 언론 전체의 신뢰를 잃어버린 사례를 제시한다.  소셜 미디어의 등장으로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기계적 중립성의 강박에 빠진다면, 세상의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믿기를 바라는 자들의 손에 놀아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우정은 다정하거나 헌신적인 관계가 아니라 다소 계산적인 것이다.


고전 낱말 중 친구에 대한 어원은 망치로 한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읽었던 것 같다.

진심으로 조언하여 잘 이끌어주되, 안 되면 그만두는 것이다. 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이 정도는 이해가 되었는데, 공자는 생각이 다른 친구를 억지로 설득하려 애쓰지 말라고 한다.  심지어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친구로 사귀지 말라고까지 한다.  그 이유는 천륜인 부모자식과 형제사이는 내가 끊을 수 있다고 해서 끊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지만 왕과 신하, 친구사이, 심지어 부부사이는 싫으면 그만두면 되는 내가 선택한 인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계약관계란 뜻이다.  기대했던 조건이 맞지 않으면 갈라서는 사이다.  



'朋友有信(붕우유신):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의 붕(朋) 자의 기원이 재미있다.



"논어의 첫 구절 속 붕(朋) 자는 보통 친구로 해석된다.  친구(親舊)는 가까이 지낸 지 오래된 사람을 의미하며, 친고(親故)라고도 했다.  붕(朋) 자의 갑골문은 그 당시 화폐로 사용되던 조개를 묶은 다발을 표현한 것이다.  돈다발을 나타내던 이 글자가 어떻게 친구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을까?  조개가 나란히 늘어선 모습에서 동등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인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고, 여기서 생각을 함께 나눈 친구라는 의미가 생겨났다."




서구 역사에서 우정이란 단어는 특정시기에 부상하였는데, 주로 생존이 절박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대기근이나 흑사병등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대처할 관계를 찾는 잘박함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수렵채집인이었던 원시시대에 인간들 역시 친족에게만 의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듯이 친구는 순수함과 이익 관계의 어느 중간쯤 되는 게 아니겠는지.  



"사람들이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것은 나를 통해 어떤 이익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모른 체하면서 그들에게 진정한 우정을 기대하는 것은 과한 욕심이다. 그래서 공자는 친구 사이에 너무 자주 충고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사이에 너무 다그치면 서로 서먹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붕우삭, 사소의友數, 斯疏矣).  너무 따지지 않기로 하자.  친구 사이에는. 그러면 작은 선의에도 감사하게 될 것이다."



중국 고전독법을 읽으며 현실의 질문들이 많은 부분 해갈이 된 기분이다.  



<인생 어휘 /이승훈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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