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
제가 앞에서 '버릇'이라고 이야기했듯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아니라 우리의 이념입니다. 이념은 원심력이 있습니다. 이념은 계속 높아지고 높아져요. 그러니까 순수를 지향해요. 선명성 경쟁은 여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순교자적 경지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누가 더 순수한가? 누가 더 명목적인가? 누가 더 철저한가? 이념은, 믿음은, 신념은, 즉 믿음의 대상은 원심력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이것은 인간의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높아지려 합니다. 멀어지고 높아질수록 진짜같이 보여요. 그래서 누가 더 저 먼 곳까지 도달하는가? 이것만 사명으로 남기 때문에 광신도가 나와요.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고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인문적 통찰의 힘이며 생존의 무기라 말하는 최진석 교수의 책이다.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는 일은 사건을 직접 경험하는 예민함과 함께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의 주장의 근간(根幹)에는 '노자'의 사상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운 좋게도 나는 오래전에 그가 쓴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을 읽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저자는 현대인들에게 인문학의 근본적인 이해와 효용성을 이해시키려 노력했고 인생에서 자신이 주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욕망이라는 알기 쉬운 비유를 통해 노자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었다.
노자는 도교의 사상적 뿌리를 제공한 인물로, 유무상생(有無相生)을 강조한 인물이다. 이 개념은 '유'를 말하면 '무'를 떠올리게 된다는 의미로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대립면의 관계에서 모든 것이 존재하기에 상호의존적 관계이며, 만물이 늘 변화 속에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공자는 구분된 앎(직분과 개인의 역할을 강조)을 강조했지만 노자는 인간의 본질과 본성을 긍정하지 않았다.
노자는 세상의 구분을 만들어내는 기준을 인위적 관념의 산물로 보았고, 공자의 일관된 개념(배움은 훈련으로 체화되고 지식화 된다)은 기준 아래 개별적 자아가 주눅 들고 고통받는 것으로 해석했다. 노자는 거대국가 시스템의 강제성이 아니라 자유분방한 지방자치제를 지향했다. 노자는 완벽에 가까운 개인주의자였다.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현대에 사는 우리는 노자의 사상을 접목시켜 설명하는 최진석교수의 인문학 해석에 호응하게 된다.
초반에 책 제목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인문人文의 문文은 원래 무늬라는 뜻이고, 인문人文이란 인간만이 그릴 수 있는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학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만의 인생을 그리는 주인으로서 우뚝 서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대답을 주저하게 된다. 정해져 있는 사회적 굴레와 관습 그리고 인간관계 속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타인축'으로 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니 괴롭고 종국엔 '사는 게 힘들다'라고 한탄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사는 게 힘들다고 느끼는 저변(底邊)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이념이 혹시 나로 착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묻고 있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지식과 가치를 의심해 보라는 의미다. 우리는 자신들을 지배하는 가치를 의심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교조주의적 집단에게서 숨겨져 있는 두려움을 발견한다. 그들이 불안하게 보이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진리라 믿는 이념이고 신념이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몰리지 않았을 뿐 대부분의 삶은 거대한 관습의 이념아래 주체성을 잃어버렸다.
인문학은 주체적인 삶, 그리고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학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라고 하면, 구체적인 세계를 넘어서서 어떤 무엇인가로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진리는 어쩐지 변화무쌍한 구체성과는 다른 어떤 것 같습니다.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어떤 형상을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런 것은 조작된 것입니다. 가공물이고 인공물이지요.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건 구체적인 실재의 세계뿐이지요.
서양철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실제 하지 않는 것들의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동양의 사유는 사유의 치밀성보다는 경험의 확실성, 경험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가 노자의 '경험'을 추앙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윤리적인 사회는 윤리규정이 만드는 게 아님을 강조한다. 덕이 있는 개별적 존재들이 많아질 때 윤리적인 사회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자기 삶을 일상에서 영위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야 하고, 구체적인 자기 일상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사회가 규정한 고정관념과 개념에 젖어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삶이 지루하고 힘들 뿐이다.
자신의 주인으로 살라는 말은 정의롭고 순수하게 들린다. 어떻게 살면 주인이 되는가. 저자는 오직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개념의 구조물인 이념에 지배되지 않고 내가 체험으로 느끼는 감각을 즐기는 삶이다. 스스로 생산자가 되는 삶이다.
노자는 세상이 만들어낸 기준들을 인위적 관념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왜 그런 기준 아래 개별적 자아가 주눅 들고 고통받아야 하는가. 모두 똑같이 수행하는 사회보다 각자 바라는 바를 다양하게 수행하는 사람이 모인 사회가 강하다고 본 것이다. 고정된 생각의 틀은 우리를 편협하게 만들 수 있다.
인문학은 자율적 사고방식을 추구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는 행복한 욕망이 시작점이어야 하는 것이다. 자율적 사고방식에는 '예민함'이 필요하다. '봄이 왔다'는 개념이 아니라 직접 새싹을 보고 새싹을 통해 확인하는 감각적 태도다. 지식과 경험이 자신을 유연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판단이 완성된 뉴스 소비를 벗어나 확신하지 않는 비판 능력을 갖춘 예민함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식이 자신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