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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n 24. 2024

이 또한 괜찮지 않은가

아픈 날이 바꾼 일상


큰 병을 앓지는 않았다. 

생을 살면서 꼬리표처럼 지병을 달고 살았지.










대학교 때는 폐결핵을 앓았다. 

취업을 준비하며 검진을 하다 알게 되었다. 

딱히 증상도 없었는데 검진한 곳에서 큰 병원을 가보라고 하더라. 


놀란 마음에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했고, 나는 결핵환자가 되었다. 

약을 먹으면 전염력은 사라진다더니 눈으로 보이는 부작용이 많았다.

얼굴이 푸석해지고 빛에 과민한 반응을 보여 피부가 검게 탔다. 졸업사진을 보면 검게 그을린 내가 보이는데 눈자위도 약물로 인해 주황빛이 된다고 하더니 생기도 사라져 보였다. 얼굴도 붓고 검게 탄데다 눈까지 흐리멍덩한 내 얼굴에 다들 큰 관심을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예뻤던 나이에 아픈 모습이 졸업사진으로 박제된 게게 아쉬웠다. 


그래도 결핵을 앓고 달라졌던 것은 건강에 해가 될 정도로 무리하게 해왔던 다이어트를 끊었고, 걷는 일들이 일상이 된 것이다. 








아이를 낳고 피곤한 게 당연한 줄 알았던 나는 또 검진을 하다 갑상선기능저하증이라는 병을 진단받았다. 



"안 피곤했어요?"


라는 의사의 말에 애 키우는데 당연히 피곤한 거 아니에요 하고 받아치고 싶었다. 

그래 잠이 미친 듯이 쏟아지더라. 나는 애를 보기 힘들어하는 내 모습에 또 자책하곤 했는데. 

갑상선 기능저하증의 대표적 증상인 피로도는 일반적인 피로보다 훨씬 더했다. 


아파서 다행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그렇게 애들한테도 짜증이 서렸구나 싶어서 나를 꾸짖지 않고 연민게 되었다. 처음으로 내가 너무 불쌍하게 여겨졌다. 매일 잘 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다그친 날이 열에 아홉이었는데. 아프고 나서는 나를 돌보는 법을 자연스레 배우게 되었다. 



남에게 책 잡힐까 책임감이 넘치던 나는 언젠가부터 그 책임감을 개나 줘 버리게 되었다. 욕먹어도 마음도 가지 않는일에 무리하게 동참하는 일에는 마음 쓰지 않았다. 

남처럼 살고 싶어 안달이 난 나는 남들처럼 하는 것들에서 슬슬 뒤꽁무니 치기 시작했다. 도덕과 양심이 무한히 발달한 나는 거기서 조금씩 손을 떼기 시작했다. 책 잡히고 욕먹는게 세상에서 가장 싫었는데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들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가짜로 착했던 나는 다소 진심으로 못 때 졌는데 그럼으로 인해 인간관계도 꽤나 헐렁헐렁해졌다. 


이 모든 걸 잘했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남에게 보이는 걸 더더더 신경 쓰던 것에서 진짜 나는 어떤 모습일까 궁리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단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건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모두에게 끌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에서 스스로를 이끌고 싶은 사람이 되었으니.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일은 덜해졌으나 나는 자유로워졌으니. 외로움을 더 끌어안고 살게 되었으나 고독을 즐기는 법도 선물 받았으니. 갑상선기능저하증은 이토록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금은 가벼운 ADHD와(적은 용량의 약을 먹어서 그렇게 생각한다) 부정맥을 또한 가볍게 앓고 있다. 


주의력이 부족한 나는 '정신 차리라'는 소리를 진절머리 나게 듣고 살았는데. 그래서 뭔가 실수를 하면 가슴이 방망이질하며 뛰었다. 절대 하면 안 될 일을 저지른 사람처럼 내 실수를 깨달으면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물건을 사방팔방에 흘리고 다니면서 내가 만졌다 하면 깨지고 부서지고 고장이 나서 나는 조심성 없는 아이로 집에서도 불렸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얼굴이 시뻘게졌다. 누구는 실수에도 그럴 수 있지 하고 쿨하게 대처하는 반면에 나는 가슴이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었다. 그래서 강박적으로 확인하고 실수를 한 건 없나 살펴보고서도 마음을 졸였다. 



내가 병을 진단받고 기질로 인한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책을 덜게 되었다. 실수를 덜 하려고 노력은 무진장 하지만 일이 벌어졌을 때 나를 '못난 것'이라고 후 드려치지만은 않았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 잘하려고 그랬잖아. 진짜 몰랐잖아. 다음엔 조금 더 신경 쓰자.'


말 한마디에 나의 불안이 녹아내렸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내가 나를 다독였을 뿐인데 조여오던 심장이 후련해졌다.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아서 내게 따갑게 굴어서 남의 말과 시선에 더 아파했구나. 색다른 경험이었다. 실수만 하면 멘탈이 무너진 나였는데 나를 달래고보니 정신이 덜 오그라들었다. 



부정맥은 또 어떤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진료 결과 심한 부정맥은 아니지만 피로와 스트레스를 다스릴 필요는 있다고 들었다. 원래도 운동은 조금씩 자주 했지만 이제는 일상의 움직임도 운동이라 생각했다. 아이들과 뛰어노는 것도 운동이며 집안일도 운동 삼는다. 과일과 야채를 갈아먹기 시작했고, 명상과 요가를 할 때 정성을 들인다. 내 몸을 고장 났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참을 터닝포인트라 생각하는 것이다. 아픈 나를 꾸짖는 게 아니라 너로 인해 또 다른 일상을 맞이하는 것이다. 조금 더 건강하게 생활하겠다고. 조금 더 느리게 살자고. 조금 덜 남과 비교하자고. 조금 더 나를 중심에 두 자고. 그렇게 마음을 이완하자고. 체력을 다스려 피로를 덜어내자고.





병은 내 신체와 정신을 변화시켰지만 나는 그로 인해 어제보다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무 지병 없이 먹는 약도 하나 없이 멀쩡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약을 먹는 지금이 마음은 더 멀쩡한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작은 병과 함께 내 일상도 가꿔 나간다. 

어제와는 조금 다른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이 또한 괜찮지 않은가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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