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 요코, 『사는게 뭐라고』를 읽고
지진 재해를 입은 친구의 전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저기, 리버 페이스트 만드는 방법 좀 알려줘.” 그 후로 그녀와 맺은 인연은 끝이 났지만 방법을 알아내어 다행이라고 안도한다. 『사는게 뭐라고』의 저자 사노 요코 할머니의 이야기다. 그녀는 매일 아침 커튼을 발로 열며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도 재수 옴 붙은 하루 일듯 하다며 불평하면서. 누워서 한국 드라마 보다가 턱이 돌아가고, DVD를 박스째 집에 사두면서 재산을 탕진하기도 한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담당 의사가 근사한 남자라서 행운이라고 한다. 엉뚱하고 이상한 할머니다. 그런데 위트 있고 여유가 넘치는 그녀의 글 속에 왠지 씁쓸함과 슬픔이 느껴진다. 그녀의 과거가 궁금해 졌다.
전쟁 직후 중국에서 태어난 사노 요코. 그 당시 보통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쌀밥을 먹을 수 없는, 500엔에 아이가 사고 팔리는 환경을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다. 본디 감수성이 예민한 그녀는 무엇을 받아들이며 그 시절을 보냈을까? 할머니가 된 요코의 삶에 대한 태도 중 많은 부분이 그 시절에 형성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가난이란 경험은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 그녀는 아마 어릴 때부터 남다른 아이였을 듯싶다. 천장에 붙은 메밀국수를 보며 비참함 속에 숨은 익살을 볼 줄 아는 아이, 결혼은 노후에 망중한을 즐기기 위한 것임을 일찍부터 깨닫는 아이였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그녀는 두 명의 형제를 잃었다. 오줌을 누며 11살의 오빠를 추억하는 엉뚱하고 위트 있는 글에서 오빠를 생각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는 것도 정말로 고단해.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적도 몇 번이나 있었는데 사는 동안은 죽을 수 없어.” 오빠에게 한 이 말이 요코 자신에게 한 말 같아 마음이 짠해졌다. 암수술을 받은 다음 날에도 담배를 뻐끔거리며 피워댔다. 죽으면 돈 걱정이 사라지니 오히려 기쁘다는, 그러나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로 죽지 않기를 바랐다. 여유롭지만 어딘가 씁쓸한 이 태도는 어린 시절에 겪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 때문은 아닐까.
요코는 두 번 이혼 했다. 결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일찍부터 깨달은 그녀지만 스스로 증오스러울 만큼 신뢰 가지 않는 인격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나 싶을 정도다. 젊은 시절 요코는 뭇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꾸밈없고, 자유롭고, 순수한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상처가 있어 보여 보호해 주고 싶은 여자가 아니었을까. 많은 남자와 친구를 하고, 뜨겁게 사랑도 했을 것이다. 두 번의 결혼은 그 사랑의 결실이고, 모두 이혼이라는 선택을 했다. 이후엔 꽤 오랜 시간을 화사한 마음을 잃어버린 채 살았다.
“노인은 시간의 비밀을 알고 있다”라는 시구가 있다. 늙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몸이 낡고,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고, 깜박하고, 화사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일까. 사노 요코, 그녀를 통해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삶의 많은 부분을 견뎌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시절과 형제의 죽음, 결혼 실패 등등 삶의 시련을 잘 견디다보면 어느 순간 일흔의 노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정말로 부지불식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순이 넘었다’고 말한 그녀처럼 말이다. 그리고 결국 알게 된다. 시간의 비밀을. ‘살아보니 별거 아니다’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