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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lberrina Apr 10. 2023

4. 바가노바와의 화해? 나와의 화해!

feat. "끌어안고 싶어" -슈퍼갤즈 OST

발레 역사를 통틀어 훌륭한 발레리나, 발레 선생님은 너무나 많다. 그중에서도 완벽한 180도 턴아웃의 발달에 있어서 가장 큰 공헌을 했을 것 같은 분은 아그리피나 바가노바 (Agrippina Vaganova 1879~1951)이다.



바가노바 발레학교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나는 무서우리만치 완벽한 턴아웃을 구사하는 소녀들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무엇보다도 무릎의 방향마저 180도에 가깝게 벌어지는 1번 플리에, 손과 팔로 마킹하는 순서를 다리로 그대로 구현해 내는 완벽한 탄듀, 서 있는 다리의 를르베가 완벽하게 턴아웃 되어 발바닥이 그대로 보이는 퐁듀가 특히 인상적이다. 다들 춤도 너무나 잘 추지만, 그 춤의 예술성을 느끼기도 전에 완벽한 턴아웃에 입이 쩍 벌어진다.


The Etude (Vaganova Ballet Academy) 2015


바가노바 발레학교는 1783년 러시아 안나 대제 시대에 "황실연극무용학교 (Imperial Theatrical School)"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혁명기를 거치면서 Leningrad State Choreographic Institute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57년 Vaganova Ballet Academy로 정착하였다. 바가노바는 30여 년간 선생님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신만의 발레 교수법을 정립했다. 당시 러시아 발레에는 프랑스 스타일과 이탈리아 스타일이 난무했는데 각각의 단점을 보완하여 러시아만의 새로운 발레를 재창조했다.



또한 과학이 발전하면서 신체 움직임에 한 과학적 분석이 가능해졌는데, 바가노바는 최초로 이를 발레에 적용하였다. 해부학, 생리학 및 물리학을 통해 발레 동작의 원리를 분석하였고 "중력과 무게중심, 균형과 평형, 원심력과 구심력, 작용과 반작용" 등과 같은 개념을 수업 용어로 제시하였다. 궁극적으로는 학생들이 각 성장과정에서 단계별로 배워야 할 동작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1934년 그녀의 저서 <Basic Principles of Classical Ballet>을 발간했다.



그녀의 체계적인 교수법을 통해 학생들의 기량이 월등히 발전하였으며, 러시아 발레의 수준이 한 단계 도약하게 된다. 이런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녀의 사망 이후, 1957년 그녀의 이름을 따서 학교 이름을 바꾸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발레학교가 거론될 때마다 그녀의 이름이 불리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전공생 시절 나에게 '바가노바'라는 이름은 서초동에 있는 발레 학원 이름이었고, 나에게 고통을 주는 발레 메소드의 이름이었으며, 내가 넘볼 수 없는 러시아 발레 학교의 이름이었고, 결론적으로는 완전무결하고 고결한 이름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예원학교 재학 당시, 학교에서 바가노바 발레학교로 약 2주간 연수를 가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너무나 설레고 유익한 시간이었지만, 나는 왜인지 이 연수를 다녀오고부터 조금씩 발레에서 마음이 멀어졌던 것 같다. '완벽한 턴아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눈앞에 있는 또래 소녀들이 완벽한 턴아웃을 구현해 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전의식이 고취되기보다는 패배감과 좌절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단체 클래스에서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완벽한 신체조건을 가진 학생이, 바가노바에서는 모든 수업마다 가득했다. '그래, 발레는 저런 친구들한테 많이 하라고 넘겨주는 게 효율적이지 않을까?' 이때부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ㅎㅎ



하지만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어려움을 갖고 있는 법이다. 바가노바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보면서 그녀의 빛나는 업적 뒤에 가려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가노바는 1897년 황실연극무용학교를 졸업하고, 황실발레단(Imperial Ballet, 이후 혁명기에 Leningrad Opera and Ballet Theatre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Kirov를 거쳐 현재 Mariinsky로 불림)에 입단하여 군무진에서 시작해서 프리마 발레리나까지 승급한다. 하지만 그녀는 훌륭한 기량을 갖고 있었음에도 나쁜 신체조건-큰 머리, 두꺼운 다리, 뻣뻣한 팔 등-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발레 평론가 Volynsky는 바가노바의 훌륭한 테크닉을 인정하며 "queen of variation"이라고 평가했지만, 그녀의 연기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호평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의 예술감독 마리우스 프티파는 그의 일기에 바가노바의 공연에 대해 반복적으로 "awful", "dreadful"과 같은 표현을 썼다. 그래서였을까? 바가노바는 프리마로 승급한 이후 1년 만에 무대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그러던 중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게 되면서, 황실 소속 대령이었던 남편이 자살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나라에서 나오던 연금마저 끊기면서 바가노바는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교사로서의 자질을 발견하였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위대한 업적을 쌓아갔다.



타인의 길고 지난한 인생을 한두 줄의 문장으로만 정의하려고 하면 쉽게 '타자화'의 우를 범하게 된다. 나와는 비슷한 구석이 없는 전혀 다른 존재처럼 느끼면서 적대시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어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애틋한 존재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들여다보면 나름의 아픔이 있고, 그 안에 성장과 결실, 행복 같은 것들도 있다. 저마다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어쩌면 본질적으로 우리는 다 똑같은 인생인지도 모른다.



바가노바의 일생에 대해 진하게 알게 되니 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다. 어릴 적 봤던 애니메이션 슈퍼갤즈의 OST "끌어안고 싶어"이다. 만화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저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는 계속 기억에 남아있었다.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던 타인도 결국 나와 똑같은 인간임을 이해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되게 묘한 감정이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이걸 이해할 수 있게 될까?'하고 생각했었다. 이제 약간은 이해가 되는 것을 보니 나도 조금은 어른이 된 걸까? 어릴 적 두렵게만 느껴지던 "바가노바"라는 이름을, 이제는 안아주고 싶은 마음도 들다니 새삼 세월이 무상하다. ㅎㅎ



계속해서 발레의 역사와 실체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존재 자체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덮어놓고 발레를 신화적인 존재로만 여기면서 '나는 타고나지 못해서 주인공이 될 수 없어'하고 억눌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고의 과정을 통해 발레 자체를 똑바로 바라보고 즐길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바가노바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면서 결국 나 스스로와 화해하게 된 것 같다. 완벽한 존재를 상정해 놓고 그와 비교하면서 턴아웃이 잘 안 되는 한심한 나 자신에 대해 주눅 들었지만,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존재의 실체를 파헤치다 보니 어쩌면 이는 내가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옭아매던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런 나와 화해를 이룩하니,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의 발전을 막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하며 에너지를 발전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 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고, 안아줄 만하다. 세상이 좀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

 


정여진 - 끌어안고 싶어 (애니메이션 슈퍼갤즈 OST)

https://youtu.be/cTlZwfiZFgc

너무 싫어 당신은 가만히 웃고만 있어도 당당하고 귀여운 느낌에 인기가 있지
너무 싫어 난 왜 느리고 바보 같을까 아무도 날 더 이상 원하지 않아
머리 좋고 빈틈없는 완벽한 당신은 나 같은 건 왠지 한심해 보이겠지
하지만 난 그대와 얘기해 보고 싶어 좋은 친구가 될 거라고 생각해

한없이 부럽게만 느껴진 당신이 혼자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지
그래 당신도 나와 똑같은 사람인 걸 자신의 나약함에 고민하는 걸
내가 조금만 용기가 있었다면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줄 텐데

너무 싫어 전하고픈 말이 가득한데도 당당하게 건네지 못하고 부끄러운걸
이런 내가 당신은 얼마나 부담이 될까 하는 맘에 한없이 작아져

무너질 듯 하염없이 울고 있던 당신이 여느 때처럼 환하게 또 웃고 있었지
있잖아 난 말이야 사실 혼자 두려워하고 있어 보잘것없고 그저 한심할 뿐이야
조금 더 내게 용기가 있었다면 지금 달려가 끌어안아줄 텐데

가만히 귀 기울여 그리고 느껴봐 상상해 봐 더는 혼자가 아니라고
그래 오늘도 누군가 흘린 눈물이 바람이 되어서 그댈 감싸고 있어

그래 당신도 나와 똑같은 사람인 걸 자신의 나약함에 고민하는 걸
내가 조금만 용기가 있었다면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줄 텐데
있잖아 난 말이야 사실 혼자 두려워하고 있어 보잘것없고 그저 한심할 뿐이야
조금 더 내게 용기가 있었다면 지금 달려가 끌어안아 줄 텐데

그래 모두가 고독하고 외로운 삶이라서 저마다의 두려움을 안고 산다면
더 이상 겁낼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당신을 끌어안을 테니까




<참고>
백지혜. (2022). 한국 바가노바 메소드의 교육특징과 교육체험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청구논문.

위키피디아. Agrippina Vaganova (http://en.wikipedia.org/wiki/Agrippina_Vaganova)

Ballet Herald. Vaganova Ballet Academy: The Birthplace of Russian Ballet
(https://www.balletherald.com/vaganova-ballet-academy-birthplace-russian-ballet/)

본문 첨부 이미지 출처:

https://vaganovaacademy.ru/video-gallery-eng.html (https://youtu.be/yYaqBs5VW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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