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프레인(2020), 데이팅 앰버
<데이팅 앰버>는 앰버와 에디라는 두 청소년의 우정과 성장을 통해 성적지향과 '나다움'을 다룬다. 영화는 시공간적 배경, 퀴어, 성장물이란 키워드에서 떠오르는 전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충분히 사랑스럽다.
동성애가 합법화된 지 고작 2년째인 1995년의 아일랜드. 가톨릭 국가의 정체성인지, 학교에서 틀어주는 성교육 비디오에는 수녀가 등장해 동성애를 금하고 이성애를 권한다. 부모는 자식이 이성애자가 아닐까 봐 노심초사한다. 남자애들은 여자와의 섹스 얘기를 성희롱에 가까운 방식으로 풀어놓느라 바쁘다. 그런 이야기에 소극적인 에디를 보며 게이가 아니냐며 괴롭히는 일도 빼놓지 않고, 레즈비언으로 낙인찍혀 혼자 다니는 앰버가 눈에 띄면 경멸 섞인 놀림을 전하기도 한다. 앰버는 그런 놀림이 지긋지긋하다는 반응으로 일관하지만,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는 게 두려운 에디는 하루하루가 괴롭다. 동성에게 끌리는 자신이 비정상인 것 같아 괴롭고, 여자애들과의 스킨십이나 사관학교 입학 준비를 통해 '남성성'을 증명하려 애쓰는 시간도 괴롭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하교하던 에디는 앰버가 던진 돌에 맞아 넘어진다. 화를 내려는 에디에게 앰버는 도무지 멈추질 않길래 던졌다며 뻔뻔한 목소리로 답하더니, 가짜 연애를 하자는 솔깃한 제안을 건넨다. 그렇게 앰버와 에디의 가짜 연애가 시작되면서 아이들의 괴롭힘과 부모의 불안은 거짓말처럼 사그라든다. 자연스레 둘이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앰버와 에디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경험을 쌓아간다. 둘의 위장 연애는 '정상성'을 입증해 자신을 보호하는 임시방편인 동시에 서로의 숨통을 틔어주는 관계를 쌓는 시간이다. 둘은 꽤 오랜 시간 서로에게 '내가 나인 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함께 하며,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그리고 홀로 괴롭힘을 당할 때도 기죽는 법이 없던 앰버는 받아들임을 넘어 드러내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앰버는 선을 넘는 애다. 처음에는 '정상'을 위장하며 자신을 지키는가 싶더니, 준비가 되자 정상의 선 바깥으로 훌쩍 넘어간다. 계속 가짜 관계에 숨고 싶어 하는 에디에게 '언제까지나 이럴 순 없다'라고 말하는 앰버는 애초에 위장 연애가 임시방편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위장 연애는 졸업할 때까지만 함께 하기로 했고, 앰버에게 졸업은 아일랜드를 떠나는 것을 의미했다. "이곳은 나를 죽일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여비를 모으던 앰버는 그러나, 어느새 주변에 자신을 드러내며 정면돌파할 만큼 용감하고 단단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지나온 고통에 머무른 채 힘겨워하는 에디에게 용기와 확신을 나누어준다. "이곳은 너를 죽일 거야. 그러니 떠나."라고, 스스로에게 하던 말을 에디에게 전하는 앰버의 목소리는 물기 어렸으나 단호하다. 맞설 용기도 떠날 용기도 없어 사회의 틀에 자신을 구겨 넣으려 애쓰던 에디를 다독이는 눈은 투명하고 따뜻하다. 마침내 에디가 "나 게이야"라고 처음으로 소리 내어 자신을 인정하는 순간, 환하게 웃으며 안아주는 두 팔에 사랑이 가득하다. 에디가 발걸음을 뗄 때까지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 굳건하다.
자신을 지킬 방법을 찾아 고군분투하던 앰버와 에디는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가 정해놓은 틀을 거부하고 너머로 나아간다. 그 방식이 정면돌파인지 도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자신을 지키는 것이니까.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지킬 용기를 낼 때까지 끈질기게 선을 넘어와 주는 친구가 필요하다. 에디가 돌아보지 않으면 돌을 던지고, 밀어내며 도망치는 길까지 좇아와 상자 가득 모아둔 여비를 쥐여주는 앰버처럼.
영화는 주류의 규칙에 따라 정상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자신을 영원히 숨기고 죽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들이 그 틀을 거부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앰버와 에디의 문제는 섹슈얼리티에 한정되어 있지만, 정상성은 성적지향, 장애, 가족, 인종, 국적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배제와 차별을 합리화하는 기준이 되곤 한다. 법과 제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촘촘히 세워진 주류의 규칙과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너무 쉽게 '비정상'이나 '자격 미달'이 되는 사회에서 누구든 오롯이 나로 존재하는 건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소속된 사회의 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을 더 많이 죽이고 숨겨야 하는 사람이 있는 건 다른 문제다. 소속된 사회가 정의하는 정상성과 자격에 따라 '그런 사람'의 기준도 조금씩 다를 것이다. 기준이 무엇이든 '이 안에 들어오면 괜찮다'라고 말하는 세상은 '이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은 알 바 아닌' 세상이다. 어느새 이러한 구분은 당연한 듯 보여서, 안과 밖을 정할 결정권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고 누가 무엇을 위해 정한 기준이냐에 따라 언제든 나도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마저도 '배제되지 않도록 노력하면 되는 문제'로 치환되곤 한다. 사회 구조가 배제와 차별을 전제하고 있지 않은가 질문하는 대신 개인의 부족함과 약함을 탓하는 식이다.
정해진 틀에 맞춰 적응하고 버티는 게 모범답안인 세상에서, 그 틀이 배제와 차별을 전제할 때 나는 나에게도 남에게도 '이곳이 너를 죽일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죽어가는 것들을 관망하며 틀 안에 숨죽이고 있는 사람일까? '나'를 지키는 아이들의 고군분투가 남긴 질문이 무겁다.
커버 이미지 데이빗 프레인(2020), 데이팅 앰버.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