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
우리 둘의 마지막 페이지를 잘 부탁해
어느 작별이 이보다 완벽할까
Love me only till this spring
오 라일락 꽃이 지는 날 굿바이
이런 결말이 어울려
안녕 꽃잎 같은 안녕
하이얀 우리 봄날의 클라이맥스
아 얼마나 기쁜 일이야
...
너도 언젠가 날 잊게 될까
지금 표정과 오늘의 향기도
단잠 사이에 스쳐간
봄날의 꿈처럼
오 라일락 꽃이 지는 날 굿바이
너의 대답이 날 울려
안녕 약속 같은 안녕
하이얀 우리 봄날의 클라이맥스
아 얼마나 기쁜 일이야
- 아이유, <라일락>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아이유의 유서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무 근거도 없이 떠오른 비합리적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순간적인 공포에 휩싸였다. 휴대폰을 붙잡고 아이유를 검색할 때 이미 펑펑 울고 있었다. <라일락>의 가사가 자신의 20대에 건네는 작별 인사라는 기사를 본 후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몰려오는 머쓱함을 휴지로 쓱 닦으며 안도감에 조금 웃었던 것 같다.
이 이상한 행동엔 그즈음 한창 듣던 <에잇>의 영향이 컸다. 당시 거의 매일 산책을 하며 이 노래를 듣곤 했다. 한 번 틀면 열 번, 스무 번씩 반복 재생했다. 노래에 얽힌 얘기를 들어본 적 있었다. 절친했던 설리와 구하라를 차례로 보낸 뒤 나온 가사라는 말들. 셋 중 누구의 팬도 아니었지만 설리가 죽었을 때도, 구하라가 죽었을 때도 슬프고 화가 났다. 남겨진 사람이 된 아이유가 어떤 마음일지 상상할 때도 있었다. 그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까. 노래로 풀어내는 걸까. 그러면 그게 갈무리될까. 내가 일기를 쓰는 것과 비슷할까. 매일 <에잇>을 들으며 걷던 길에서 이런 질문들을 떠올렸다. 아이유의 자살 소식마저 들려올까 불안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많이 한 건 내 생각이었다. 그때 나는 몰입하던 일이 끝나며 목표 없는 삶으로 돌아온 감각을 낯설어하고 있었다. 삶이 공허하다는 새삼스러움을 견디기 어려워 다시 자살을 검색하곤 했고, 죽을 용기가 없음을 괴로워하며 밤을 보냈다. <에잇>에 꽂힌 건 아이유나 노래에 얽힌 사연 때문이 아니었다. <라일락>을 들으며 여느 이별이 아닌 죽음을 떠올린 것도 그즈음 내 마음 상태 때문이었을 테다.
‘세상에 객관적인 건 없다’는 말을 좋아한다. 모든 것은 주관적이며 부분적이고 당파적이다. 모두 자신의 상황과 상태에 따라 세계를 보고 듣고 느끼며 판단한다. 전자에 따라 후자도 다르게 해석되므로, 같은 정보나 경험을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하다. 같은 사람이어도 자신의 상황이나 생각, 마음 상태의 변화에 따라 경험이 재해석된다. 이 글에서 논할 아이유의 노래와 세계 역시, 내 감상을 바탕으로 내 렌즈를 통해 해석한 결과물이란 점을 짚고 갈 필요가 있겠다.
주관적 수용의 문제는 앞서의 조금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뿐만 아니라 ’아이유가 들려주는 세계'가 궁금해진 계기와도 연결된다. 아이유의 노래를 꾸준히 듣기 시작한 건 2015년 발매된 <챗셔> 앨범부터였다. 그 앨범은 당시 여러 방면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그중 수록곡 <제제>의 일부 가사와 앨범 표지에 대한 논란에서, 난 노랫말이 문제가 되진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앨범 아트와 노랫말, 인터뷰가 모두 모이니 아이유의 제제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속 꼬마가 아니라 아이유를 투영한 매개체로 보였다. 문제는 제제와 밍기뉴가 스물셋 여성 가수의 자아를 투영해 섹슈얼리티를 담기에 -문학의 해석 면에서도 윤리 면에서도- 적절한 오브제가 아니라는 점이었고, 나는 그 지점에서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아이유의 앨범과 당시의 인터뷰를 통해 나는 그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오독했다고 판단했지만, 바람직함을 떠나 누구나 어떤 때에는 접하는 모든 것에 자신을 투영해 산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내가 <라일락>을 처음 들었을 때 유서를 떠올렸던 것처럼 말이다. 애초에 그 앨범에서 아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노래했다. 타이틀곡 <스물셋>의 화자는 "확실히 지금이 좋"다가도 "때려치우고 싶"고, "속마음과 다른 표정을 짓는 일 아주 간단"하며, "색안경 안에 비춰지는 거 뭐 이제 익숙"하고 "겁나는 게 없"지만, "인사하는 저 여자 모퉁이를 돌고도 아직 웃고 있을까" 불안해한다. 수록곡 <무릎>의 화자는 누군가와의 어떤 시절을 향한 그리움을 안은 채 쉬이 잠들지 못하며, "지친 것 같"고 "이 정도면 오래 버틴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앨범은 '지금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하여 좀 더 가까이, 좀 더 멀리 보고 싶지 않다'는 내용의 <안경>으로 끝난다. 당시 나는 불안하고 위태로우며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을 내비치는 앨범 속 화자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가 안쓰러웠다. 이해와 비판은 별개의 영역이며 공존 가능하다는 맥락에서, 그 앨범의 모든 것이 이해 가능했으나 앨범 속 문제적 오브제는 비판받을 요소였다. 하지만 그 앨범의 어떤 비판 지점도 당시의 과열된 반응과 비난을 정당화해 줄 만큼은 아니었다. 그게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이유가 들려주는 세계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2년 뒤, 아이유는 정규 앨범 <팔레트>로 대중에게 돌아온다. 타이틀곡 <팔레트>에서 아이유가 자신을 말하는 방식은 취향의 나열 정도에서 그친다. 타인의 반응을 넘겨짚으며 불안해하는 대신 "날 좋아하는 거 알아", "날 미워하는 거 알아",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이라는 말로 이어지는 노랫말이 멜로디와 함께 한결 차분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흥미로운 변화였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은 지점은 <이름에게>를 통해 말하는 ‘너’의 아픔이다. <이름에게>의 화자는 잊힌 ‘너’를 기다리며 "반드시 너를 찾을게"라고 약속한다.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름에게>는 이전 앨범에서 ’나의 불안’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던 아이유의 시선이 '너의 아픔‘으로 확장되는 기점이 된다. 그리고 이 정서는 2년 뒤 나온 <Love Poem> 앨범 속 동명의 노래와 연결된다. 앨범의 마지막 곡인 <Love Poem>에서 아이유는 "누구를 위해 누군가 기도하고 있나 봐"라며 운을 띄운다. 다시 "유난히 긴 밤을 걷는" 너의 아픔을 노래하며, 이번엔 "너의 긴 밤이 끝나는 그날" "그곳에 있"겠다고 말한다.
끝없이 길었던 짙고 어두운 밤 사이로
조용히 사라진 네 소원을 알아
오래 기다릴게 반드시 너를 찾을게
보이지 않도록 멀어도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
수없이 잃었던 춥고 모진 날 사이로
조용히 잊혀진 네 이름을 알아
멈추지 않을게 몇 번이라도 외칠게
믿을 수 없도록 멀어도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 아이유, <이름에게>
너에게로 선명히 날아가 늦지 않게 자리에 닿기를
I'll be there 홀로 걷는 너의 뒤에
Singing 'till the end 그치지 않을 이 노래
아주 잠시만 귀 기울여 봐
유난히 긴 밤을 걷는 널 위해 부를게
...
너의 긴 밤이 끝나는 그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곳에 있을게
- 아이유, <Love Poem>
2021년, 4년 만에 정규앨범으로 돌아온 아이유는 노래 곳곳에서 다시금 '나'를 꺼내어 놓는다. 이번 앨범에서 보여주는 ‘나’는 확연히 단단해지고 넓어진 그의 세계를 담고 있다. 자신의 20대에 고하는 작별인사 <라일락>에는 한 줌의 어두움이나 후회가 없고, 이어지는 노래들에는 다양한 사랑이 녹아 있다. 별나고 소중한 친구를 향한 무조건적인 응원(<Celebrity>), '나'의 아픔과 유약함을 받아들이는 마음(<아이와 나의 바다>), 삶에서 만난 많은 이들을 향한 사랑과 그들로 인해 완성되는 삶의 의미(<에필로그>)가 그 예다. 특히 <아이와 나의 바다>는 놀랍도록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보편적 타인을 위로하며, '나'와 '너'로 구분되지 않고 넓어지는 세계를 보여준다. 혐오나 연민 없이 ‘나’를 직시할 줄 알고, 헤매지 않을 자신이 아니라 돌아올 자신이 있는 화자의 세계는 따뜻하며 단단하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어푸>의 화자 역시 마찬가지다. 바다를 헤엄치며 속이 울렁이거나 물 먹더라도 "겁이 나기는 재밌지 뭐" 하고 훌훌 털어내며, “해일과 함께 사라질 타이밍"은 '내'가 고르고, 상대의 행운을 빌며 "지겹게 보자고" 인사한다. 이와 같은 여유와 강함의 바탕에는 판 안에 있는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인지, 그리고 자기 확신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일들이 있지
내가 날 온전히 사랑하지 못해서
맘이 가난한 밤이야
거울 속에 마주친 얼굴이 어색해서
습관처럼 조용히 눈을 감아
밤이 되면 서둘러 내일로 가고 싶어
수많은 소원 아래 매일 다른 꿈을 꾸던
아이는 그렇게 오랜 시간
겨우 내가 되려고 아팠던 걸까
쌓이는 하루만큼 더 멀어져
우리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
어린 날 내 맘엔
영원히 가물지 않는 바다가 있었지
이제는 흔적만이 남아 희미한 그곳엔
설렘으로 차오르던 나의 숨소리와
머리 위로 선선히 부는 바람
파도가 되어 어디로든 달려가고 싶어
작은 두려움 아래 천천히 두 눈을 뜨면
세상은 그렇게 모든 순간
내게로 와 눈부신 선물이 되고
숱하게 의심하던 나는 그제야
나에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
선 너머에 기억이 나를 부르고 있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던 목소리에
물결을 거슬러 나 돌아가
내 안의 바다가 태어난 곳으로
휩쓸려 길을 잃어도 자유로와
더 이상 날 가두는 어둠에 눈 감지 않아
두 번 다시 날 모른 척하지 않아
그럼에도 여전히 가끔은
삶에게 지는 날들도 있겠지
또다시 헤매일지라도 돌아오는 길을 알아
- 아이유, <아이와 나의 바다>
내게 <라일락> 앨범을 관통하는 정서는 믿음이다. 이 믿음에는 자신의 가장 약한 모습까지 받아들인 이의 성숙함이 있고,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을 사랑하며 함께 걸어가는 세계가 있다. 도망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계다. 그 과정과 맥락을 그의 노래를 통해 조금이나마 엿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의 노래와 함께 어른이 되어 기쁘다. 가끔은 벅찬 마음으로, 그가 들려줄 다음 세계를 기대한다.
커버 이미지 아이유 배경화면(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