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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Jul 31. 2023

실연편지

네 곁에서 가만히 발맞춰 걸어야지 느리면 느린 대로 빠르면 빠른 대로 네가 웃을 때 같이 웃고 네가 울면 휴지를 건네줘야지 언젠가는 시선을 돌리지 않을까 같이 나눈 시간이 즐거웠다고 위안이 된다고 좋아한다고 말하며 웃어주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너를 기다려서 보답을 바라서 욕심을 부려서 혹시나 들켜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꼭꼭 숨겨도 줄줄 샐 만큼 간절해서 간절히 바라면 안 이루어지는데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짜였어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도 풍요로웠던 순간이 많았으니까 좋아하는 게 별거 아닌데 별거더라 신기할 만큼 온 마음을 다해 좋아했어 네게 줄 수 없어서 버린 마음을 어딘가에 팔았다면 난 그 돈으로 뉴욕에 다녀왔을 거야 멋대로 준 마음에 기대를 갖지 않으려 했지만 희망은 어쩔 수 없었고 상실은 가져본 적 없어도 느낄 수 있는 거였어 나눈 이야기들은 내게만 의미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다 망친 걸까 쓸모없는 질문을 곱씹으며 나를 갉아먹었어 자꾸만 초라해지고 비참해졌어 네게 사랑받지 못하는 나를 미워하며 마음이 많이 가난해졌어


너를 찾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지키는 건 어렵지 않았어 과거가 되었다고 생각했어 너와 매주 걸었던 길 갔던 카페 식당 술집 어디를 가도 슬프지 않았고 생각조차 나지 않는 날들이 많았어 가끔씩 너는 어떻게 지낼까 궁금함과 약간의 그리움이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딱 그만큼이었는데 정말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네 연락을 받고 다시 만난 날 우스울 만큼 단숨에 마음이 휘청였어 이유도 없이 웃고 있단 걸 네 말을 듣고서야 알았어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며 생각했어 이대로면 또 헛된 희망으로 네 주변을 맴돌겠구나 사랑에 빠진 너는 어떤 표정일까 네가 좋아하는 가수를 말할 때처럼 눈이 반짝거릴까 질문이 많아질까 묻지 않아도 네 얘기를 많이 들려줄까 상상하면 슬펐고 또 눈물이 쉬워졌어 네게 도망치지 말라 했지만 정작 도망치지 말아야 하는 건 나였어 아니 이게 도망치는 걸지도 몰라 마음이 가난해지고 싶지 않아서 또 괴롭기 싫어서 다시 욕심내다 이번엔 너를 미워하며 추해질까 무서워서


네가 큰 힘을 받았다던 그래서 자주 떠올렸다던 편지를 쓴 날엔 사실 조금 울었어 너에게 전해도 되는 가장 예쁜 마음만 골라 담고 전하면 안 되는 마음을 버리는 과정이 슬퍼서 너는 적어도 나에 대해서는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내가 남들보다 좋단 말도 소중한 사람이란 말도 사실일 테지 옆에 계속 있었다면 언젠간 정말로 날 봐 주지 않았을까 아닌 걸 알면서도 양손에 미련과 후회가 가득해 이렇게 괴로울 줄 알았다면 관계를 끊지 않았을 텐데 옆에 있어도 없어도 울보가 된다면 네 얼굴이라도 보면서 우는 게 나을 텐데 아니 어떤 선택을 하든 괴로운 게 사랑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나도 너와 같은 마음에서 멈출 수 있었다면


마음은 마음처럼 되지 않고 그 안에서 내가 한 선택이니 어쩔 수 없단 거 알아 지나가길 바랄 밖에 누군가를 너만큼 좋아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 평생 너를 마음 한구석에 두고 살 것 같아 그래도 그곳을 들여다볼 때 슬프지 않은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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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썼을 땐 하루만에 지웠다. 이제는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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