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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Sep 15. 2024

별 의미 없는 회고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죽은 지 1년도 더 되었더라. 그러고 보니 작년에 얼핏 쿤데라의 사망 소식을 들었던 것도 같다. 그때는 스쳐 갔다가 이제야 떠오르는 건 그의 소설이 다시금 스멀스멀 떠오르는 시기이기 때문일 테다.


    유작이 되어버린 『무의미의 축제』는 2014년에 읽었다. 서점의 신간 가판대에서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저자명과 새로운 책 제목에 냅다 집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전작들과 달리 얇은 두께와 따뜻한 내용에 '할배 유작 아니냐'며 농담했던 기억도 난다. 진짜 유작이 될 줄은 몰랐다. 10년쯤 지나서야 될 줄도 몰랐다.


    쿤데라를 꽤 많이 좋아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냉소와 지성에 매료되어 민음사 전집을 한 권씩 사 모으던 시절도 있었다. 『무의미의 축제』는 『농담』을 읽은 후에 나왔던 것 같다. 존재에 대한 죄의식과 삶의 이유없음을 견디기 어렵던 시절이었다. 죽을 용기는 없었다. 자기혐오에 절은 채 자원 낭비에 지나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존재도 삶도 무의미하다는 말을 어떤 비관이나 자기연민도 없이 서술하는 책에 위안을 받은 건 당연했다. 존재는 현상이지 가치가 아니다. 삶에는 딱히 이유가 없다. 인간 존재에 대한 의미 부여가 자의식일 뿐이라면 괴로울 이유가 없었다. 비대한 자아에서 오는 죄의식도 마찬가지였다. 한발 더 나아가 그 무의미를 사랑해야 한다는 설득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의미를 향한 집착을 내려놓고 나를 수용할 가능성 말이다. 책 한 권에 인생이 바뀌진 않았으나, 책을 읽으며 받은 감각과 정립한 사고는 지금의 나를 이루는 중요한 성분이 되었다. 여전히 그보다 더 큰 위안을 주는 무엇도 만난 적 없다.


    그 후 두어 번, 새해를 맞이할 때 『무의미의 축제』를 읽곤 했다. 몇 년 동안 쿤데라의 여러 책이 일상에 함께 했다. 『삶은 다른 곳에』를 읽고, 『웃음과 망각의 책』을 읽고, 읽다가 포기한 게 『우스운 사랑들』이었던가 『이별의 왈츠』였던가. 그사이 나는 20세기 할아버지 작품에 있는 여성혐오적 묘사를 그냥 넘길 수 없는 21세기 젊은 여성이 되었고, 그렇게 쿤데라는 기억 한편으로 넘어갔다.


    그래도 여전히 그의 책들을 좋아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준 충격도, 『농담』을 관통하는 정서에 대한 공감도, 『무의미의 축제』에서 받은 위안도 여전히 내 안에 있다. 지성은 무언가를 사랑하면서 비판할 수 있게 하니까.


    이 글을 왜 쓰기 시작했더라? 쿤데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책장에 『무의미의 축제』가 없음을 깨달았다. 책을 사러 서점에 다녀오면서, 그 책을 누구에게 줬더라, 한참 생각한 뒤에야 몇 년 전 사랑을 구걸하던 사람에게 선물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삶이 지루하고 허무해서 견디기 어렵다던 그에게, 내가 비슷한 감각에 힘들어하던 때 큰 위안을 받은 책이라고, 네게도 그러면 좋겠다는 편지와 함께 건넸다. 일 년쯤 지나 그때 그 편지에 큰 힘을 받았다고 전하던 그는 정작 책은 읽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은 읽었을까? 안 읽었겠지. 아마 영영 안 읽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랩탑을 켰다.


    쿤데라의 첫 작품인 『농담』은 1967년에 나왔다. 그 책이 45년쯤 지나 한국의 어떤 여자애에게 공감을 샀다고 생각하니 새삼 신기하다. 1929년 체코에서 태어난 할아버지의 책이 스물 몇 살쯤 먹은 한국 여자의 마음을 울리고 인생을 건드렸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통찰을 이야기로 전하는 문학 작가의 능력은 봐도 봐도 놀랍다. 쿤데라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도, 가장 많은 작품을 읽은 작가도 아니지만, 이제야 접한 그의 죽음을 핑계 삼아 이런저런 기억을 끄집어내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렇게 꺼낸 기억 중 문학을 사랑하고 동경하는 마음이 있으니 괜히 애틋하다. 다시 소설을 읽어야겠다.





커버 이미지 밀란 쿤데라(2013, 국내 출판 2014), 『무의미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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