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퇴양난(進退兩難)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려운 처지
둘째가 급식실에서 친구에게 맞고 왔다. 아 정정. 때린 건 친구가 아니다.
<둘째가 급식실에서 다른 반 아이에게 맞고 왔다.>
무려 뺨을 세대나 때리고 어깨를 두대나 때렸다고 한다. 막말로 싸대기를 날리고 어깨빵을 쳤다는 말이 아닌가! 눈이 뒤집힐 일이다. 당장 분개하고 일어나 교무실로 쫓아가 담임선생님을 만나 그 다른 반 애를 내 눈앞에 데려다 놓으라고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야 내 맘이 풀리겠다.
하지만 우리 둘째는 이런 불같은 엄마의 성격을 무서워한다. 정확히는 엄마가 화를 내고 큰소리를 내고 성질을 부리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한다.
한다면 하는 사람, 말한 건 꼭 지키는 사람. 그러니까 엄마가 학교로 달려간다 하면 분명 달려갈 걸 알고 걱정을 하고 겁을 낼게 분명하다. 겁을 낼만큼 낸 다음에는 입을 꼭꼭 닫아 버리고 나에게 다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을게 분명하다.
겁 많은 순딩이 둘째와의 눈치보기가 시작되었다.
- 누군지는 모르고?
2: 엉 얼굴은 아는데 누군지는 몰라.
- 선생님한테 말했어? 도와달라고 하지.
2: 말했는데 선생님이 못 들은 척했어
사실 이 대목에서 나의 이성은 거의 끊어졌다. 아니 왜? 애가 말을 했으면 좀 들어줘야지. 거기에 다른 반 애가 자기 반애를 때렸는데, 얼굴을 맞았는데! 한가닥 실낱같은 이성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이어서 말했다.
- 그래? 우리 2호가 선생님한테 말했는데 선생님이 못 들은 척하셨구나, 급식실에서 그런 거라 정신없으셨나 보다. 2호 마음이 많이 안 좋았겠다. 많이 속상했겠어.
우선은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 아이가 너를 때렸다는 건, 게다가 얼굴을 여러 대 때린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엄마는 지금 너무너무 화가 나지만 이건 엄마가 화를 낸다고, 소리를 지른다고, 속상해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야. 그래서 엄마는 이 문제를 차분하게 대처하려고 해, 엄마가 선생님한테 전화해서 상황을 좀 얘기하고 같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하는데 2호 생각은 어때?
2: 엄마가 너무 화내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난 엄마가 화내는 건 싫거든. 엄마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사실 초등 저학년인 아이들은 폭력과 장난의 경계가 모호한 때가 많다. 복도를 걷다 살짝 스쳐가는 터치도 폭력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엄마 눈에는 저게 분명 괴롭히는 것 같은데 그걸 놀이라고 하기도 한다.
아마 그런 것이리라. 그 아이는 방과 후 수업을 같이 듣는 우리 2호를 급식실에서 만나 반가워했을 테고 반가움의 표시로 얼굴에 손을 대었을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자니 너무너무 화가 난다. 열이 뻗쳐서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눈으로 보고 있기만 해도 아까운 내 2호를 감히 때리다니! 그것도 이뻐서 보고 있기도 아까운 넙데데 얼굴을!!
우선 찾아야 했다. 그 몇 반 인지도 이름에 어떤 글자가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그 아이를 찾아서 제대로 사과를 받아야 지금 당장 나의 열받음이 해결이 될 거였다.
먼저 담임선생님께 전화 상담을 요청해 상황을 알리고, 그 아이를 찾아 중재를 해달라고 요청했고 당연히 그 아이의 부모에게도 알려 다시는 이런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교육을 부탁한다고 요청했다. 다행히 선생님은 자신의 눈밖에서 일어난 일에 진심 어린 사과를 해주셨고, 아이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잘 조치해 줄 것을 약속하셨다.
(이후에 정말 많은 사실들이 오가며,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선생님의 재발방지와 상대 아이 엄마의 진심 어린 사과, 그리고 우리 둘째의 대인배적인 아량으로 해결 아닌 해결이 되었다.)
그날 늦은 오후 셋째 담임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셋째가 도서관 앞 화장실에서 다른 반 친구를 발로 차는걸 다른 반 선생님께서 보시고 혼쭐이 났다고, 상대 아이에게 사과를 했고, 다행히 다치거나 사과를 안 받아주거나 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오해를 받을 수도,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사안이니 집에서 꼭 지도를 해줘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암요 선생님, 상대방 아이의 부모님은 전달받으셨나요, 제가 사과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알려주십시오. 제가 전화로라도 사과를 하고 싶습니다. 셋째는 집에서 단단히 주의를 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남의 집 애를 욕할 때가 아니다. 아이고.
결국은 저녁을 먹는 식탁에 다 같이 모여 앉아, 다른 사람에게는 손대면 안 된다는 것, 난 장난이라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남자아이고 여자아이고 서로 손가락 끝도, 머리카락 끝도 스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등등 6학년인 첫째가 1학년인 시절부터 입에 달고 살았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혹여라도 다른 아이가 널 때리거나 밀치거나 건드릴 경우 남자고 여자고 따지지 말고 선생님과 엄마에게 말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하루종일 화를 내다가 걱정을 하다가 잔소리와 염려로 마감하는 엄마를 보며 익숙한 듯 바라보던 첫째는
1: 엄마, 지금 둘째는 맞고 오고, 셋째는 때리고 온 거지? 어휴 우리 엄마 머리에 지진 나겠네, 나라도 사고 치지 말고 학교 잘 다녀야겠어~
하하하하하하 이제 고작 13살뿐인 첫째가, 아 법이 바뀌었으니 11살이구나. 그런 아가 같은 첫째가 엄마가 굳이 입밖에 내지 않은 어미의 작은 소원을 찰떡같이 캐치해 준다.
때리는 아이, 맞는 아이, 오지랖 넓은 아이 등등 다양한 성향의 삼형제를 키우며 가끔 벼락같은 일들이 한 번에 몰아치곤 한다. 마치 장마철 우르릉 쾅쾅 천둥 번개처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할 새도 없이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해야 하는데 그럴 땐 혼자서 오롯이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 사무친다. 특히 이번 둘째의 일과 같이 처음 겪어 본, 여러 날에 걸친 폭력과 희롱에 가까운 상대 아이의 가해 행동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둘째에겐 어떤 위로와 치유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든 상황과 모든 고민이 난감했다.
맘 같아선 에라 모르겠다, 저 나쁜 노무 시키네 집에 쫓아가서 소리라도 고래고래 질러대면 속이라도 시원해지려나 싶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건 모두에게 특히 우리 둘째에게 건강하지 못한 해결방식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몇 날 며칠 속에 난 천불을 끄느라 애꿎은 맥주만 마셔댔다.
잠들기 전 하루종일 엄마의 눈치를 살피던 첫째가 심각한 얼굴로 묻는다.
1: 엄마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나도 잘 모르겠단다 아들아. 제발 넌 학교에서 공부만 하고 오렴.
아마도 엄마는 내일 사과 전화를 하고 사과 전화를 받을 예정이란다.
점심부터 시작된 두통이 가라앉질 않아 결국엔 냉장고 깊숙이 감춰둔 맥주를 한 캔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