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단어는 주관적이다
육아는 부모에게 새로운 일상을 선물한다. 알람 대신 아기의 소리로 아침을 시작하기도 하고, 밤에는 아기의 잠을 깨울까봐 조용히 소곤거리며 대화하기도 한다. 행동에 있어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주기도 하고 전에 하지 않았던 행위들(동화책 읽기, 동요 부르기 등)을 수십 번 반복하게도 한다. 내 식사메뉴 정하기도 모자랐던 시간에 아기 식단을 짜고 밤까지 요리를 하기도 한다.
솔직히 이러한 새로운 일상이 항상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다. 전에 가던 조용한 맛집도 가고 싶고 전처럼 책 한 권 들고 카페에 가서 여유를 부리고 싶기도 하다. 사실 아기와 함께하려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그러고 싶지 않다. 나의 소소한 행복이 아기의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7개월인 우리 아기는 팔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이게 되어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기어 다닌다. 양손은 또 얼마나 야무진지 모른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금세 기어가서 가까이 가보기도 하고 뒤로 기어서 멀리서 보기도 하고 손으로 야무지게 잡아 입에 넣는다. 집에 있으면 이 모든 탐색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외출하는 순간 아기의 행동은 급격하게 제한된다. 유모차에 앉아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장난감만 들고 바깥풍경만 바라보거나 안겨서 낯선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는 것뿐이다. 집에서는 깔깔 웃던 아기가 바깥에서는 너무 많은 자극 때문인지 두리번거리다가 피곤해하며 잠든다. 이런 아기를 데리고 바깥에 오랜 시간 머무르고 싶지 않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기도 행복하다'는 문장을 처음 들은 건 모유수유를 하며 처음 들었다. 모유수유가 힘들다는 고민 글에 엄마가 행복해야 아기도 행복하다며 분유수유를 권하는 댓글들이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일찍 어린이집에 아기를 보낼지 고민하는 글, 시판이유식을 먹일지 고민하는 글, 미디어 노출을 고민하는 글들에서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는 부모들의 다양한 고민을 해결해 주는 마법의 문구 같은 것이었다. 양육자가 편해야 행복하고, 그러면 아기도 행복(?) 하기 때문에 양육자의 편의가 우선시되어도 좋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엄마들이 육아를 하며 갖는 작은 죄책감들을 쉽게 떨쳐준다는 점에서 위 문구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실제 아기에게 좋은 지는 정확한 사실을 기반으로 생각해야 한다. 일찍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이 '아이에게도 좋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아이에게는 이른 단체생활이 불편한 일이지만 양육자에게는 일정 부분 자유시간을 주기 때문에 보낸다.'라고 인지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육아에 적용하기에는 주관적인 잣대이다. 누군가에게는 아기에게 건강한 밥을 만들어주는 것이 행복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아이를 방임하며 편하게 누워 행복해 할 수도 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기도 행복하다'는 문장의 무분별한 쓰임 속에 기존의 양육형태(모유수유, 가정보육 등)가 고루한 것으로 치부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