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일이다. 애들 과자라도 사주려고 일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그 시간 동안 일일 시험지 돌리는 일이었다.
기분이 좋은 하루는 마음부터 상쾌했다. 그날은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날도 일일 시험지를 가가호호 배달 중이었다. 그때 약 3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아주머니가 손짓하는 거였다.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달리자, 아주머니가 달려와 자전거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
“아줌마 시험지 아줌마 맞죠?”
“네, 맞아요.”
‘앗싸 시험지 신청하시려나.’
“네, 네 사모님. 뭐 일일 시험지 필요하세요?”
“아니요, 시험지 신청하는 게 아니고요... 다름이 아니라 이야기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요?”
“사실은 우리 아이들도 연년생인데 요 녀석들이 문제집을 사 주었더니 풀지 않아서요. 아주머니 애들도 연년생이라고 해서 문제집을 줄까 해서요. 아이들이 좀 풀기는 했어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문제집 다 풀었어도 괜찮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척 좋아합니다. 저야 너무 감사하지요.”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집에 들어가서 가지고 나올게요.”
아주머니는 문제집 3권을 들고 나오셨다. 1학년, 2학년, 4학년 문제집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문제집을 받아서 자전거 바구니에 담았다.
‘이 아주머니도 나처럼 아이들이 연년생인가 보구나.’
“사모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주머니께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슈퍼가 눈에 보였다. 마트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감자칩과 새우깡, 칸초와 우유를 5개 사서 아주머니 집으로 가 벨을 눌렀다.
“아니 어떤 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와 우유를 샀습니다. 고맙습니다.”
과자와 우유를 아주머니 손에 쥐어주고 자전거를 타고 시험지를 배달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벌써 소연이가 집에 와 있었다.
“우리 소연이 일찍 왔구나! 오늘 학교 공부 맛있었어?”
“엄마 공부가 맛있어? 하하하!! 엄마는 공부가 맛있대.”
“그~럼 공부도 입으로도 먹고 머리로도 먹고, 손으로도 먹고 맛있지 않았을까?”
막내 소연이를 꼭 껴안으며 엉덩이를 토닥거려 주었다. 소연이는 내 볼에 뽀뽀하며 내 품에서 빠져나갔다.
“소연아, 오늘 아침에 엄마가 시험지 돌리고 있는데 착한 아주머니가 너희들 주라고 문제집 주었다. 소연이 것도 있고, 언니 것도 오빠 것도 있어. 그 착한 아주머니 집에도 너희들처럼 연년생 형제들이 있나 봐.”
“정말? 엄마 나하고 나이가 같은 애는 몇 반이래요?”
“아~~ 아 엄마가 그걸 못 물어보았네. 착한 아주머니가 문제집 주시니까 정말 고마워서 고맙다고 인사하다가 물어보는 것을 잊었네.”
“엄마 문제집 어디 있어?”
“자전거 바구니 안에 있어. 기다려 엄마가 갖다 줄게.”
자전거 안에서 문제집을 꺼내서 나오자, 현정이가 오고 있었다.
“현정아 학교 잘 다녀왔어?”
“네 엄마. 엄마 손에 뭐예요?”
“이건~~” “언니 엄마가 그러는데 착한 아줌마가 문제집 주었대.”
소연이는 현정이를 보자마자 재잘거렸다.
“언니, 아까 엄마가 나보고 공부 맛있게 먹고 왔냐고 했어.”
소연이가 언니한테 조잘거리고 있을 때 종호가 인사를 하였다.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오 종호 왔어. 수고했어.”
“오빠 공부 맛있게 먹고 왔어?”
“이 맹꽁아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공부 열심히 했어요’ 하는 거야.”
“오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 엄마가 그랬어! 공부도 먹는 거라고.”
“이 맹꽁아 공부를 어떻게 먹어, 너 책을 먹을 수 있어?”
“엄마가 그랬어! 공부는 입으로도 먹고 머리로도 먹고, 손으로도 먹는다고 했어.”
“종호, 현정, 소연 이제 티격태격 그만하고 엄마 이야기 들어봐. 엄마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뭐냐 하면 엄마가 시험지 보는 집에 가서 전과며 문제집을 다 수거해 올 거야. 그런 다음 수거해 온 문제집과 전과를 학년에 맞추어 학생들에게 가져다주는 거야. 그럼 문제집이나 전과 구매 못 한 친구들도 공부를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너희들 생각은 어때?”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말하자 현정이가 말했다.
“엄마, 힘들겠지만 생각은 좋아요. 오빠, 우리 문제집도 착하신 아줌마가 주셨대. 우리도 문제집을 못 샀는데 덕분에 다행이었잖아. 그렇지?”
현정이는 소연이와 오빠한테 대답을 물었다. 그러자 종호가 말했다.
“나는 반대. 학교 공부도 많은데 문제집 안 풀면 엄마만 고생하잖아. 그리고 이미 문제집을 다 풀었는데 어떻게 푸니? 소연아, 너는 문제집 푸는 거 좋아?”
“오빠 나는 좋아. 오빠는 싫어?”
“나는 싫어. 다른 친구들이 다 푼 건데 어떻게 풀어?”
종호는 이미 다른 친구들이 풀어버린 문제집을 푼다는 게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때 현정이가 말했다.
“다른 친구들이 푼 것을 지우고 다시 풀면 되지!”
“이 바보야 엄청 두꺼운 책을 누가 그걸 다 지워. 현정이 네가 다 지울래? 아이고 이 바보다. 다음 날 손목 아파서 노트 필기도 못 하려고.”
종호는 계속 반대 의견을 하였습니다. 나는 종호 이야기를 듣다가 말했다.
“맞아 지우개로 다 지우는 것은 힘들어. 그런데 너희들 용돈 벌고 싶지 않니?”
종호는 내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엄마 우리가 학생인데 어떻게 용돈을 벌어요. 학생들한테 돈 벌게 하면 아동학대라고 배웠어요. 엄마 아동학대 하려고요?”
종호는 진지하게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 아동학대 하면 안 되지요. 이렇게 잘생긴 아들을 학대하면 엄마가 아니고 계모 엄마이겠지. 엄마는 팥쥐 엄마가 아니라 콩쥐 엄마 닮아서 그러니까 착한 엄마다 이거야. 너희들에게 보상 없이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맞는데, 엄마를 도와주는 너희들에게 정말 고마워서 용돈 주고 싶어서 그런 거지. 좋은 일은 아동학대가 아니란다. 엄마가 매로 때리면서 이 문제집 다 지우라고 명령하면 아동학대가 되지만, 너희들 의사결정을 듣고 용돈을 주는 거니까 싫은 사람은 안 해도 되고 엄마를 도와주고 싶은 사람은 도와주면 되고. 그럼 아동학대가 아니지, 아닐까? 엄마도 헷갈리네….”
내가 아이들에게 강제성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자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종호, 현정, 소연이는 서로 얼굴을 쳐다만 보고 있더니만 종호가 말했다.
“알았어요. 그러면 우리 용돈 주는 거죠?”
“그럼 주고말고. 고마워.”
내가 고맙다고 하자 종호가 벌떡 일어나서 다른 방으로 들어가더니만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와서 말했다.
“엄마 여기에다 용돈 꼭 준다는 약속 쓰시고 도장 찍으세요.”
나는 종호가 제시한 대로 종이에 용돈을 주겠다는 약속을 쓰고 지장을 찍었다. 종호는 내가 지장 찍은 옆에 ‘김종호’라고 쓰고 지장을 찍고는 말했다.
“현정, 소연 너희들도 이름 쓰고 지장 찍어 빨리.”
“응 오빠 알았어.”
소연이는 종호가 하라는 대로 하였다. 그런데 현정이는 가만히 앉아 있자 현정이에게 재촉하였다.
“현정 너도 찍어.”
“오빠 나는 괜찮아.”
“현정 그럼 너는 증인이다. 알았지?”
“김종호 이제 다 됐습니까?”
“네, 문제집 어디 있어요?”
“아직 없고 너희들 의견 물어보고 수거해 오려고.”
“정말요?”
“저 힘이 좋아요.”
종호는 조그마한 팔뚝 알통을 보여주며 으스대자 소연이가 오빠 팔을 두 대 손바닥으로 탁탁 때렸다.
“오빠 안 아파? 정말 안 아파?” “안 아파 하나도 안 아파.”
다음 날 나는 가가호호 다니면서 시험지를 주고 전과와 문제집을 수거해 왔다. 그리고 종호, 현정, 소연이는 저녁을 먹은 후 문제집 지우는 작업을 하였다. 우리 가족은 지운 문제집을 집집이 전해주러 나섰다.
“김종호 저쪽 파란 대문 두 번째 집 현섭이 가서 주고 와. 현정이는 이쪽 이 층집 희숙이네 집이야 갖다주고 와. 소연이는 언니 따라가서 지하에 살고 있는 미나 언니 주고 와.”
나는 종호, 현정, 소연이와 함께 지우개로 지운 문제집을 학년에 맞게 시험지를 보는 고객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종호, 현정, 소연 수고했다! 자~ 우리 손을 부딪치자.”
“짝 짝 짝! 자 자 이제 우리 짜장면 먹으러 가자. 우리 아르바이트생들 수고했으니 사장님인 내가 한턱 쏜다! 콜라도 쏜다! 가자, 가자, 짜장면집으로 가자! 우와!”
“우와 가자!”
우리 가족은 짜장면을 각자 한 그릇씩 맛있게 먹고 킥킥대며 귀가했다. 우리 가족은 매년 새해가 되면 문제집을 지우개로 지워 가가호호 일일 시험지 보는 고객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강제로 공부를 시킨 것이 아니라 문제집을 스스로 지운 것을 다시 풀어 100점이 나오면 용돈 두 배를 주었더니, 아이들은 답이 살짝 보이게 지우고 그 위에 답을 써서 100점을 맞았다고 신이 났다. 나는 모르는 척하고 용돈을 두 배로 주어 아이들이 공부가 재미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아르바이트생'들은 의젓한 어른으로 자라났다. 가끔 짜장면을 먹을 때면 나는 여전히 그때가 떠올라 웃음이 난다. 부족함 속에서도 나누는 법을 먼저 배웠던 그 시절의 우리.
참으로 예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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