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으로 학교를 옮긴 지 어느새 10년째 접어들었다. 처음 전보했을 때만 해도 2년 뒤 원래 있던 천안으로 복귀할 심산이었는데 인생이 어디 계획대로 되던가, 당진은 머리털 나고 두 번째 오래 머문 곳이 되었다. 뜻하지 않게 중병을 앓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치료를 마치고 바로 복직하다 보니 다시 학교 옮기고 이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힘겨웠다. 때마침 부모님도 광명으로 이사하여 굳이 천안행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그 결과 늦깎이 교사 시기 절반을 당진에서 보냈고 이변이 없는 한 나의 마지막 일터가 될 것이다.
얼떨결에 교직에 입문했기 때문일까, 연고 하나 없는 충남에 자리 잡았던 탓일까, 그도 아니면 나의 비혼 신분이 문제였을까. 나는 늘 떠돌이 같았다.
외모는 충분히 중견교사인데 다방면에 서툰 나를 대하는 동료교사들의 어색함이 예민하게 다가왔다. 하물며 사범대학 출신의 늙은 편입생이었다. 학연도, 지연도 없는데 경력까지 없었으니 어색함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 불편함의 거리를 좁히는 발걸음을 먼저 떼지 않고 꽤 오랫동안 주변인으로 살았다.
남들은 내가 몇 마디만 해도 “선생님이시지요?”라고 묻는다.(심지어 교사가 아니었던 시절에도 가끔 듣던 말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교사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았던 것은 최근 몇 년, 이곳 당진에서였다.
교사가 되기 위한 노력이 게을렀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의 특성이 초등교사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고민도 많았고 더디지만 꾸준히 필요한 부분을 갖추려 애썼다. 처음 2,3년 빼고 교사를 그만둘까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몸에 딱 맞는 맞춤옷은 아니어도 썩 괜찮은 기성복 정도? 답답하고 무력감을 느낀 적도 많았지만 직업으로서의 교사에 만족하고 있다.
그럼에도 왜 그리 안정감이 떨어졌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거처의 불안정성이 큰 몫을 차지했다. 평일과 학기 중에는 당진에서 생활하고 주말과 방학에는 부모님이 있는 광명에 주로 있다 보니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 길게 있을 생각이 아니었던 당진 집은 오래 묵은 가구들과 계획 없이 들여놓은 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해결책은 이사뿐인데 왠지 당진에 계속 있을 것 같지 않아 결심을 미뤘다. 부모님과 동생이 있는 광명 역시 방 한 칸에 필요한 물건들만 놓아둔 임시거처일 뿐 온전히 내 공간일 수 없었다.
밥벌이는 안정되었지만 삶의 터전이 정해지지 않다 보니 직업 정체성도 물렁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전형적인 농경민족의 후예다. 땅에 뿌리를 내려야 마음 놓인다. 서있는 곳이 수시로 달라지면 불안감이 높아져 생산력이 떨어진다.(방바닥과 친한 이유 역시 내가 농경민족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일단 친해진 것은 좀처럼 놓으려 하지 않는다.
생활 근거지가 두 곳이니 무엇을 하려 해도 시작점을 광명으로 해야 할지, 당진으로 해야 할지 모른다는 핑계로 미루기 일쑤였다. 의지도 박약한데 ‘뜨내기 삶’에 익숙해진 태도는 게으름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사람들과의 친분도 마찬가지. 안 그래도 인간관계가 정답지 않은 편인데 3,40대는 육아 때문에 있던 인연도 끊어지는 시기였다. 미혼인 내가 타지에서 새롭게 관계 맺기는 더욱 쉽지 않았고, 일터에서의 대화도 맞장구 이외에 나눌 화제가 없었다. 하물며 관계가 싹틀 만하면 서울로, 천안으로, 당진으로 일터를 옮겨 다녔으니 나의 인간관계는 한해살이가 대부분이었다.
혼자서도 잘 노는 체질이니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사회성이 부족하지는 않았던 터라 깊은 이야기가 오가지 않을 뿐 학교생활도 무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쑥불쑥 사람과 내 공간이 그리웠다. 흘러가는 생각과 감정을 밀도 있게 나눌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이들과의 접촉면을 넓혀가는 공간이 있기를 바랐다.
조만간 다가올 퇴직 이후 삶을 생각하니 초조해지는 마음도 부인할 수 없었다. 직장인을 졸업한 나는 어떤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머문 지 10년째지만 최근에야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한 당진? 아니면 부모님과 동생이 있는 경기도?
방향을 정해야 불안감이 사라지는 농경민족의 후예인 나는 삶의 터전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한 채 외로워만 했다.
당진에서 두 번째 학교로 옮긴 2020년은 코로나가 시작된 해였다. 유래 없는 팬데믹 시대를 맞아 교육현장 역시 새로움을 요구하고 있었다. 학습공동체 문을 두드렸다. 예전 같으면 변화를 위한 방법으로 연수 이상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나였다.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연구회인 학습공동체 가입은 소통과 연결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비슷한 시기, 교내 독서모임에서도 내게 손 내밀어주었다. 먼저 선택한 학습공동체와 시간이 겹칠 수도 있는 상황. 구성원은 한 사람 빼고 일면식 없는 이들이었다.
‘모르는 사람들하고 생각을 나눈다고? 심지어 두 모임 다 하겠다고? 아서, 너답지 않아. 농경민족의 후예, 안 된다고 해!’
일단 저지르기를 결단 아닌 만용이라 여기는 과거의 내가 자꾸 말렸지만 ‘일단 저질렀다.’
그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냐고?
다시 말하지만 나는 농경민족의 후예, 뿌리내리기가 힘들지 한번 박으면 당최 달라질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다. 주중 당진, 주말 광명. 부유하듯 살아온 20년 생활에 익숙해진 내가 그 고리를 끊는 첫 발을 내딛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것은 작은 발자국이지만 떠돌이처럼 살아온 나에게는 엄청난 도약이었다.” 말하면 닐 암스트롱이 “어이, 모임 하나 한다고 내 말을 인용하다니, 과하잖아.”라며 벌컥 성내려나. 그렇게 표현하고 싶을 만큼 새롭게 뿌리내리고 싶어 하는 50대 미혼여성의 대견한 한 걸음이었다고 이해해 주길.
이렇게 시작한 독서모임 인연을 4년째 이어오고 있다. 소망 한 방울이 마음 밖으로 나오니 물에 번져가듯 확산작용이 일어났다. 손님 같던 마음이 사라져서일까,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띄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또 다른 기회로 다가왔다.
덕분에 당진에 온 지 5년 만에 코앞에 있어도 몰랐던 멋진 산책길을 발견했다. 봄을 맞은 당진천, 면천 골정지의 벚꽃이 얼마나 근사한지, 한여름을 알리는 합덕제 연꽃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됐다. 특색이 뚜렷해 매력적인 지역서점들, 다채로운 도서관 프로그램도 눈에 들어왔다. 4년 전 작은 한 걸음은 <1인 1 책 프로젝트>에 참여해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제 당진에 뿌리내린 걸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간 보듯 앞으로 살아갈 곳을 재고 따지지 않는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지 모르는데 막연히 불안해만 하는 모습도 옅어졌다.
더하여 현재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전에 없던 관심과 애정으로 살펴본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의 땅 속에서 잔뿌리가 뻗어가고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