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할 수도, 즐길 수도 없는 나이 듦을 맞이하는 나만의 방법
드디어, 마침내, 결국 돋보기를 맞췄다.
40대 후반부터 책을 읽을 때 눈이 흐릿해져 노안경을 찾는 이들도 있으니 내일 모래 환갑인 내가 돋보기가 필요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럼에도 이 녀석과의 만남은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평소 나이 듦을 순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흰머리가 늘어나도 그렇구나, 주름이 생기고 턱살이 늘어져도 그럴 때가 됐지 하고 말았다. 결코 반가울 리 없는 변화지만 어쩌겠는가, 보톡스와 필러로도 막을 수 없는 게 가는 세월인데. 하지만 돋보기를 쓰고 있는 나는 이상하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돋보기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순간부터 노년으로 공식 포함되는 느낌이랄까, 내게는 인생의 후반부라는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다.
노안(老眼), 단어부터 얼마나 늙어 보이는가. 백발, 주름, 골다공증, 관절염. 노화의 증상을 대표하는 표현들이지만 쇠퇴함을 직접 언급하는 무례함은 없는데 눈의 낡음을 지칭하는 말은 왜 이리 노골적인지. 더욱이 머리가 좀 희끗하거나 주름이 자글자글 하다고 해서 심미적인 처짐은 있을지 몰라도 할 일을 못하는 건 아니다. 반면 노안은 어떤가, 메모에 적힌 작은 글씨를 보기 위해 눈살을 찌푸린 채 최대한 팔을 뻗거나,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는 모습은 누가 봐도 기능이 떨어져 보인다. 단지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부족해진 나 자신을 확인하는 순간. 내 노력과 상관없이 겪어야 하는 결핍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지난해 겨울에도 안과를 방문했는데 의사는 굳이 안경을 권하지 않았다. 내심 아직 그 정도로 눈이 늙지는 않았나 보다 싶어 뿌듯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실 노안경은 일찍 사용할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권해서 구입하면 아무 소용없어요. 쓰지 않고 처박아두니까. 본인이 필요하다고 결심했을 때 맞춰야 해요. 괜히 도수만 다시 조정하게 됩니다. 환자분도 이제 진짜 안경 써야겠다 생각될 때 다시 오세요.”
양쪽 시력 편차가 큰 나는 그동안 ‘짝눈’ 덕을 많이 봤다. 가까운 곳과 먼 곳을 볼 때 각각의 눈이 더 큰 역할을 하며 어찌저찌 버텨온 셈인데 책을 읽을 때 하루가 다르게 글자가 흐릿해지니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 그래, 인정하자. 눈이 늙었다.
안경점에서는 컴퓨터 화면을 볼 때와 책을 볼 때 도수가 달라야 한다며 보는 각도에 따라 도수 차이가 있는 안경을 권했다. 초심자답게 렌즈는 하라는 대로 맞췄지만 안경테는 아니었다. 일반 안경 절반 크기 직사각형인, 저렴하지만 누가 봐도 돋보기인 모양을 단호히 거절하고 내 딴엔 돋보기 표 안 난다 여겨지는 비싼 안경테를 주문했다. 허나 이를 어쩌나, 늙은 표는 안경테에서 나는 게 아니었다. 가까운 거리를 볼 때만 주섬주섬 꺼내 쓰는데 모양이 뭣이 중할까. 괜스레 헛돈만 썼다. 모양만이라도 돋보기가 아닌 척 허세를 부리고 싶은 마음, 반갑지 않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기회비용인 셈이다.
노화를 인정했으니 신세계가 열리겠지. 안경점에서 첫 사용을 해보았다. 웬걸, 시선을 조금만 돌려도 울렁임이 장난 아니었다. 보는 위치에 따라 초점을 맞추다 보니 당분간 그럴 거라고, 뇌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안경사의 설명이었다. 도대체 뇌는 언제나 적응하려는지, 아직도 어지럼증이 이어지는 중이다. 도수가 안 맞는 거다, 원래 돋보기를 쓰고 멀리 보면 그렇게 된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이 사람 저 사람 의견이 분분하다. 신세계는 무슨, 시간이 흘러도, 안경 도수를 달리해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노화를, 낡음을 완전히 대체하거나 극복할 방법은 없으니까.
머리가 굵은 이후 내 삶을 이어온 가장 큰 힘은 ‘노력’과 ‘책임감’이었다. 내 삶의 주인으로 서려면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을 수 있는 경제력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살았다. 독신으로 중년을 맞이하자 항목에 ‘건강’이 추가됐다. 내가 일군 가족이 없으니 나를 책임지기 위한 노력을 더욱 알차게 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의지로 해결되지 않는 영역은 없다 여겼다. 이제 와 생각하니 젊으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고 믿음이었다.
받아들이자. 돋보기를 써야 하는 때가 왔다. 내 눈이, 내 몸과 마음이 낡아간다. 애쓰고 노력하면 그 시간을 조금 더디게 할 수는 있겠지만 흐릿한 사물을, 더뎌지는 움직임을, 가물가물한 기억력을 의지만으로 돌이킬 수 없다. 결국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니까. 나는 흐르는 시간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임을 인정했다. 심지어 돋보기를 쓴다 해서 불편함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안경 두께는 점점 두꺼워질 수밖에 없을 것임을 포함해서 말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내공이 부족한 나는 도저히 노화를 즐기지는 못하겠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영역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나 오는 노화를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미련은 버리려 ‘노력’한다. 내리막길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상처를 줄이며 내려올 수는 있을 테니까.
익숙해지면 흐릿한 내리막길의 경치도 즐겁게 감상할 수 있겠지. 시간은 걸려도 나만의 돋보기를 찾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