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머리도 만집니다. 삿포로 여행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비에이를 가는 날입니다. 비에이 여행을 하는 방법은 버스투어를 하거나 렌트를 하는데 단체 투어는 제 스타일이 아니니 렌트를 하기로 합니다. 삿포로에서 비에이까지 운전하기는 힘드니 우선 기차를 타고 비에이에서 가까운 도시로 갑니다. 기차 티켓을 잘 못 사서 역무원에게 벌금을 냈지만 괜찮습니다. 멍청하면 돈을 조금 더 쓰면 됩니다.
어찌어찌 렌터카를 찾아 비에이로 갑니다. 일본 운전은 처음이라 왼쪽, 오른쪽이 좀 헷갈리지만 괜찮습니다. 천천히 가면 됩니다. 어딜 가야 할지 잘 모르니 투어 버스가 다니는 코스에서 가기 싫은 곳은 빼고 가고 싶은 곳은 넣고 하나하나 방문합니다. 비에이는 말 그대로 눈 천지입니다. 여름의 비에이는 라벤더가 꽃핍니다. 겨울엔 라벤더 밭에 눈꽃이 꽃핍니다.
유명한 크리스마스 나무도 보고 맛있는 새우튀김덮밥과 따뜻한 라테도 마시고 전화도 터지지 않는 산 중턱에 위치한 온천도 갑니다. 야경으로 유명한 마을을 갈까 하다가 오전에 흐리던 날씨가 오후가 되니 개어 노을을 보고 싶어서 다시 크리스마스 나무로 갑니다. 그 마을에 못 가본 건 아쉽지만 괜찮습니다.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까요. 덕분에 쌓인 눈 위로 고개를 내민 달을 보았으니까요.
하루 종일 눈밭을 걸었습니다. 말 그대로 눈 밭. 라벤더 밭에 쌓인 눈을 하루 종일 신나게 밟습니다. 그러다 제 무릎까지 폭신하게 쌓인 깨끗한 눈밭을 발견하고는 눈처럼 하얀 당신이 생각나 당신 이름 세 글자 새겨놓을까 하다가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당신 이름과 음은 다르나 의미는 같은 세 글자 적어두었습니다.
저는 요즘 당신 이름 세 글자를 떠올리는 것이 참 힘이 듭니다. 반면에 사랑이라는 단어에 집착합니다. 저에게 이 두 단어는 표기만 다를 뿐 의미는 같을터인데, 왜 이리도 다른 걸까요. 하나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달픔이고 다른 하나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이기 때문일까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던 당신은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나요? 저 없이도 잘 지내는 걸 보니 그게 저는 아닌가 봅니다.
절기로는 이미 봄이 왔지만 저는 아직 이 겨울을 떠나보낼 자신이 없어 제주로 삿포로로 겨울을 쫓고 있습니다만, 더 이상은 도망칠 곳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제 그만 겨울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이제 그만 봄을 맞으러 돌아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