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동물을 좋아했다. 이런저런 이유의 선택으로 동물 관련 계열에 몸담고 있지만 일을 제외하든 일로 만나든 동물을 만나는 건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다.
본가에 고양이 세 마리가 부모님과 지내고 있다. 한때는 그 셋의 생명을 위한 책임감으로 살아있었고, 어떤 때에는 하루종일 침대에서 세 고양이와 함께 뒹굴거리는 맛에 살았다. 내 존재가 그들의 삶을 지탱하면서 함께 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존재로 내가 이 삶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인생의 큰 선택을 한 뒤로 나는 고양이들과 떨어져 살고 있다. 거리가 멀어지고 난 뒤로는 더욱 안을 수 없는 허전함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최근에 알게 된 내 안에 사랑이 많다는 사실이 자꾸만 다른 생명에게 무조건 줄 수 있는 사랑을 주고만 싶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만족할 수 없는 현실에 주저하는 나에게 누군가는 그저 꺼져만 가는 생명들이 나를 반겨줄 것이라고 바람을 불었다. 정말 그랬다. 너무 돕고 싶고 잘해줄 자신도 있었다. 그저 직업도 없고 자가도 없는 현실에 선을 긋고 있었을 뿐, 오히려 그 전의 반려동물들은 그런 현실을 볼 새도 없거나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로 들여왔었다.
물론 고양이들은 지금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고 아무 문제 없이 부족하지 않게 잘 지내고 있다. 더 해주지 못하는 내 마음만 자꾸 부족하게 느껴지는 거지. 이전에 책임을 다 하려 했던 생명에게는 아직도 미안함이 가득하다. 그땐 나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편향된 사랑이었던 것 같다. 그 아이를 보낸 뒤로 다신 동물을 들이지 않으리라 크게 마음을 먹었었다. 너무 미안해서.
고양이들도 역시 내 의도와 다르게 내 안으로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책임을 다하고자 이렇게 나를 다독이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저들이 있는 이상 다른 동물을 또 품지 말자고. 그런데 그 마음이 지난겨울에 한 번 녹아내렸다. 잠시 임시 보호를 했을 뿐이지만 그때엔 정말 최선을 다해준 것 같다. 하루에 두세 번 이상 산책을 시키고, 간식과 옷과 장난감, 방석들까지 이런 내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아낌없이 해주게 되더라. 어쩌면 나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나를 느끼면서 지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 하지 못해 미안해졌다. 그런 생각들이 서로 돌고 돌다 보면 나는 정말 동물을 키울 자격이 없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내 안에 사랑이 가득 차 넘쳐흐를 때면 사랑이 필요한 동물을 찾아보며 고민하곤 한다. 어차피 못 데려올 걸 알면서도 주변에 여러 번 떠보기도 했다.
사랑과 책임은 반비례하는 걸까. 사랑이 넘칠수록 책임은 가려지고, 책임이 보일수록 사랑을 참게 되는데. 이런 생각들의 종착지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나 하나 건사도 못하는데 누굴 책임지냐는 말들이 떠올라서 나는 과연 나를 잘 책임지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답은 모르겠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운도 많이 작용하는 것 같아서 단언할 수가 없다.
그래도 사랑하면서 살면 책임져야 하는 만큼 나도 더 풍요로울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얘기려나. 이것도 나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싶어 드는 생각인 걸까. 그래서 신은 나에게 새 생명도 선물해주지 않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