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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 나무 Dec 11. 2023

좋은 삶은 과정이야, 존재의 상태가 아니라...*

엄마의 용감한 도전을 함께 하며 느낀 것들


‘The good life is a process, not a state of being. It is a direction not a destination.’


- Carl Rogers(1902~1987)


제목에 쓴 문구는 평소 좋아하는 심리학자 칼 로저스의 'On Becoming a Person'이라는 책에 나오는 문장 일부이다. 20대 중반 처음 이 문장을 읽고 가슴이 뛰었다. 지금도 잘 모르겠는 세상살이를 그때는 마치 다 알기라도 하는 듯 경험도 없으면서 잘난 척할 때였다. 얼마나 근사하고 멋진 문장인지, 외워두면 있어 보일 것 같아서 매년 다이어리에 적어 놓곤 했었다. 고작 머리로만 알던 이 문장의 의미를 수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것 같다. 삶이란 어떤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고 있다고... 정체된 것 같이 느껴지는 그 순간조차도 어떤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 말은 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엄마의 암 진단 소식과 수술, 항암치료까지 엄마를 간병하는 기간은 다음을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공교롭게도 코로나 19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시기와 겹쳤다. 뉴스에서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감염자수와 사망자수 소식에 나 역시 생생한 두려움에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바이러스에 대항하기 위한 치료제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내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하루하루 하고 또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두려움을 마주할 힘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았다.


처음엔 짙은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는데, 언제부턴가 어렴풋하게나마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그동안 내가 엄마에 관해 몰랐던 것들과 진짜 세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건강 문제로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고 늘 하루 1만보를 걸으시고(뇌졸중을 예방하시려는 뜻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새벽마다 왕초보 영어를 공부(치매 예방 차원에서였다는 것 역시 나중에 알았다)하시던 엄마가 한순간 상상하지도 못한 병에 걸리셨다는 것을 알게 된 날. 지금 돌아보니 그날은 나에게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든 일 투성이었지만 많은 것을 새롭게 경험했다. 엄마의 병으로 인해 가족으로서 겪는 고통과 아픔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엄마를 돌보면서 오랜만에 함께 보낸 시간은 특별하고 의미 있었다.


직장 때문에 지방에 내려간 것이 10년여, 한 달에 한두 번 서울에 올라와 하루 이틀 집에 있어도 진솔하게 대화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8개월 동안의 시간을 고스란히 엄마와 함께하면서, 엄마의 지난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엄마의 어린 시절, 행복했던 시간, 가슴 아팠던 장면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그동안 몰랐던, 엄마가 기억하는 나의 과거 이야기도 넘치게 들었다. 엄마의 지난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엄마가 참 많이 고생하셨구나’, ‘이제 이렇게 늙어 가시는 건가 보다’ 하는 서글픔과 애처로운 마음 한편으로 엄마의 삶에 대해 깊은 감동을 느꼈다.



왼쪽. 주사 치료실에서 대기하는 동안 남긴 메모/ 오른쪽. 후배가 선물해 준 책 '엄마의 마지막 말들'은 큰 위로가 되었다.


누구나 죽는 것은 정해져 있고,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죽음에 대해서 체감하게 되기는 쉽지 않다. 나 역시 죽음은 막연한 것이었고 부모님이 나이 들어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두 분이 계시지 않은 삶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평소 건강에 대해서는 의심조차 하지 않으실 만큼 문제가 없었기에 더욱 안심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질병과 죽음은 특정한 사람을 골라서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시간을 선택해서 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깊이 체험했다. 지금은 오늘 하루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부모님이 그저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이렇게 공개된 공간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그것도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남기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힘들었던 시간을 내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뜻하지 않게 닥쳤던 2020년 7월부터 2021년 2월까지 8개월 간의 시간을 어떻게든 기록하고 기억하고 싶었다. 2021년 3월 경에 생각나는 대로 시간 순서대로 써 두었었다. 그러다 덜컥 브런치에 글을 쓸 기회를 얻었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 시기가 되어 그런지 그전부터 막연히 상상하던 일을 시작해 볼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잘 정리된 생각도 잘 다듬어진 글도 아니지만 내 경험을 나누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아름답고 세련된 글은 아니더라도 내 마음에 충실하면 될 것이라 스스로 격려하면서... 이렇게 업로드하는 동안 지난 시간들을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감정을 차단하고 이성만으로 겨우 버텼던 시간들이 다시 재생되니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긴 터널을 지나온 듯한 벅찬 느낌도 들었다. 무엇보다 치료기간 동안 엄마의 모습을 다시 되짚어보니 당신이 얼마나 큰일을 해내셨는지, 얼마나 용감한 분이신지를 아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글을 빌어 엄마에게 더할 수 없는 존경과 사랑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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