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p 두 번째 문단은 아래와 같다.
그 문단에는 나약한 내가 부끄러워서 차마 원고에도 쓰지 못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5월, 전세사기로 죽지 못해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모습을 담은 글을 브런치에 [전사사기, 지옥의 문 앞에서]로 연재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낮에는 초밥집에서 저녁에는 횟집에서 하루 12시간씩 주에 6일 일을 하면서 글을 썼다. 나의 사연을 알림으로써 한 사람이라도 나 같은 고통받는 사람이 줄어든다면 내가 쓴 글의 목적이 이뤄진다는 절절한 마음으로.
처음에는 글을 쓰다 눈물이 나오면 침대에 쓰러져 좌절하였다. 그렇게 몇 번 깨지고 나다 보니 마음에 굳은살이 배겼는지 울면서 계속 글을 써 나아갈 수 있었다.
그즈음 뭐 하고 지내냐는 부모님의 걱정에 인터넷에 글을 쓰는 중이라고 했는데 어느 날 누나가 브런치의 글을 보았고 부모님께 그 사실을 알렸다.
아직 부모가 되어보지는 못했지만, 어느 부모가 자식새끼가 술을 마시고 옥상 난간에 올라섰다고 하는데 가만히 있겠는가.
당시 카드론이 900만 원 남아있었는데 어머니는 마치 사채업자처럼 내게 돈을 제발 좀 받아달라고 아침저녁으로 전화하고 메시지를 남겼다.
얼마가 필요한지 말만 하라고 했다. 아무 대답 없는 내게 전세금인 5800만 원이 필요하냐고 일억이 필요하냐고 집을 팔아서라도 내 빚을 갚아주겠다고 하였다. 아무 대답 없는 내가 답답했는지 아무 말 없이 돈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명의로 대출을 받으면 이자가 6프로 대라며 10프로 대로 대출을 받고 있는 나를 설득하였고, 나는 못 이긴 척 부모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사실 너무 힘들었다. 주 6일 12시간 근무를 하면 몸이 상해 가는 게 느껴졌다. 몸은 상해도 회복되어겠지만, 정신에 생긴 상처의 흉은 시간이 얼마나 흘러도 절대 지워지지 않을 만큼 깊었다.
차마 먼저 도와달라는 말을 못 해 부모님이 글을 봐주길 바라면서 글을 쓰고 있다는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저녁 횟집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 있었다. 낮에는 초밥을 만들고 저녁에는 글을 썼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눈물 속에서 책이 피어났다.
무수한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왔다. 방송에서도 연락이 왔다. 하지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책 홍보가 아닌 정책 수립에 피해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는 것이다.
한동훈 장관님께서 내 책에 언급했을 때부터 국토부의 연락을 애가 타게 기다리는 중이다. 제발 원양 상선이 떠나가기 전에 연락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