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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수 May 05. 2024

힘든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인가?

 전세사기를 당하고 원양상선에 승선한 지 벌써 5개월 가까이 지났다. 그동안 호주 한 항차, 카타르 한 항차, 오만 한 항차를 끝내고 두 번째 항차에서 한국으로 복귀하는 중이다. 이틀 전 싱가포르 해협을 지났다. 

지금껏 항상 업무 시간에 싱가포르 센터를 통과하였는데 이번에는 아침과 점심 사이의 쉬는 시간에 통과하였다. 운이 좋게도 점심 메뉴는 간단한 냉면이었다. 평소 9첩, 10첩으로 깔리는 반찬들은 절인 무와 명태회 정도만으로 간소히 차려지고 냉면과 만두만 내면 된다. 쉬는 시간이 1시간 30분에서 2시간으로 늘어난 덕에 카메라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갑판에서 마음껏 관광할 수 있었다.


 몇 번을 봐도 마리나베이샌즈는 감탄이 나온다. 파도를 닮은 곡선을 가진 세 개의 건물 위에 배가 떠 있다. 다만 마리나베이샌즈를 육상에서 본 사람들은 건물의 아름답다고만 느낄 수 있다. 건물은 비단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뿐만이 아닌 주변 경관과 얼마나 잘 조화되는지도 중요하다. 마리나베이샌즈의 진가는 바다 위에서 만날 수 있다. 수백 척의 배들이 있는 바닷가에서 마리나베이샌즈는 어느 배들보다 높은 파도 위에 올라가 있어 마치 배들의 왕 같은 위엄이 느껴진다. 도심 상공의 구름마저 비밀의 왕국으로 통할 수 있을 것처럼 신비롭게 떠 있다.

 마리나베이샌즈의 뱃머리가 인도양에서 태평양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서양의 문물이 동양으로 전파되는 것 같기도 했고, 세상의 중심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바뀌는 의미 같기도 했다.


 운이 좋게도 우리 배는 곧 싱가포르 도크에 들어간다. 한국에 갔다 다시 돌아오면 한 달간 배 수리를 하며 싱가포르의 밤을(하루도 쉬지 않고 낮에는 일해야 한다.)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그런 연유로 다시 마리나베이샌즈를 만나면 과거 유럽의 이민자들이 대서양을 건너 마침내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만났을 때, 반가워했던 느낌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오랜만에 육지에 발을 딛으면 아메리칸드림에 첫발을 내디딜 때의 짜릿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 달간의 배 수리를 마치고 오만에 다녀오면 아마도 하선한다. 순간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문득 군대에 있었을 때도 시간이 빠르게 흐르길 바란 게 떠올랐다. 십 년 전 내 청춘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다.

 서른세 살인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스스로 청년이라 말하기 조금은 부끄럽다. 국가에서는 34세를 청년(여느 부서는 39세)의 마지노선으로 정해 놓았다. 내게 청년은 곧 청춘이고 35세가 되면 청춘도 끝이다. 청춘의 터널 먼 곳에 끝을 알리는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 지나온 날들을 그리고 앞으로의 날들의 날짜를 계산해 봤다. 

 전세 경매 통보받은 날로부터 1,013일이 흘렀고, 엘지전자 헝가리 법인을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온 지 434일이 되었다. 경매가 완료된 날로부터 386일이 흘렀고 승선한지 143일이 되었다. 

앞으로는 싱가포르 도크에 들어가기까지 20일 남았고 하선하기까지 81일이 남았다. 그리고 내 청춘(35세가 되는 생일)은 655일 남았다.    


 나의 ‘푸른 봄’은 내가 원치 않아도 빠르게 흐를 예정이기 때문에 지금의 힘겨운 현실에도 소중하게 아껴가며 하루하루를 충실하기로 했다. 어제는 앞으로의 선상일기에 쓰려했던 재료 중 괜찮은 두 에피소드를 가지고 바다문학상에 지원했다. (역대 수상작들의 수려함에 감탄하며 지원에만 의의를 둔다.) 

 하선까지의 81일 동안 두 가지 목표를 정했다. 싱가포르에서 청춘의 설렘을 느껴보기, 문학상을 하나 더 지원하고 종이책 출판을 목표로 글쓰기. (매일 저녁 흔들리는 배 위에서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쓰고 다음날 숙취를 느끼며 퇴고하기) 

 물론 본업인 조리원 업무는 단연 최우선 순위로 하여 하선했을 때 선상생활에 뿌듯함을 느끼고 싶다. 마치 하루에 한 알씩 복용하는 180개 들이 종합비타민을 불과 200일 만에 마지막 한 알을 맞이한 것처럼.   


 서른이 될 때 ‘늙은 기분이 어떠냐고’ 20대 초중반의 친구들에게 질문을 받았다. (좀 더 부드러운 워딩이었는데 내 기억 속에서 변질되었다.) 이미 28, 29살부터 30살이 될 준비를 마쳤던 나는 ‘열권이 들어가는 책꽂이에 매년 일기를 한 권씩 적어 세 번째 칸까지 채우고 이제 네 번째 칸에 꽂힐 새로운 일기를 적어나가는 기분’이라고 대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보다도 다양한 경험을 하며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30대 초반의 내 일기는 전세지옥 속에서 불타버렸지만 앞으로의 일기는 지옥 속에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싱가포르를 지나며 존재할 리 없다고 확신하는 하느님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내 청춘이 전세사기로 얼룩이 지며 끝나지 않기를. 

전세사기를 이겨내고 내 꿈인 조종사가 된 채 중년(?)을 맞이하길.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더라도 힘든 청춘 하루하루를 소중히 사용하며 내 힘으로 반드시 꿈을 이룰 것이다.      


PS1. 전자책으로 출판된 [선상일기]가 온라인 서점에 등록되었습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선상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3,800원짜리 전자책 하나 사주십시오. 


   

교보문고 링크: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480D240472810?LINK=NVE


PS2. 최근에 바다에서는 만나지 못한 육지의 봄을 그리워하며 방에서 해바라기씨를 발아시켰습니다. 만약 해바라기가 꽃을 피우면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배는 항상 봄이었다.’를 제목으로 작문하려고 밑 재료를 다 구상해 놓았는데, 아쉽게도 봄은 갑판 위를 넘어오지 못했습니다. 해바라기는 꽃을 피우지 못한 채 떠나버렸어요. 

혹시 봄이 없는 곳에서 지내면 그 기간만큼 청춘을 좀 더 길게 설정하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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