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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극한직업 Jul 25. 2023

굿바이, 오사카 (feat. 여행의 이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오사카에서의 마지막 아침은 분주했다. 짐은 매일 밤 정리를 했지만 잠옷, 세면도구, 충전기 등을 아침까지 사용한 물건들을 마저 챙기고 분실물이 없도록 꼼꼼하게 확인해야 했다.

용돈도 최종 점검을 했다. 지속적으로 교육한 덕분인지 용돈이 부족한 아이는 없었다. 하지만 해외여행에서 현금은 많이 남는 것도 골치 아팠다.

그래서 트래블월렛 카드를 만들고, 번거로워도 소액씩 출금을 한 것인데, 애쓴 보람이 있었다. 대부분 남은 현금이 많지 않아서 한 끼 식사나 간식 정도를 사면 소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날이니 현금을 우선적으로 사용해 소비하도록 당부했다.

카드에 남은 돈은 ‘환불하기’ 버튼 하나면 원화로 다시 환전할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아이들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일본을 떠나자마자 잽싸게 환불까지 완료했다.


사용방법이 너무 쉬운 나머지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생기기도 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나 된 어느 날, 한 부모님이 통장에서 트래블월렛 이름으로 자꾸 돈이 빠져나간다며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카드가 복사된 것 같다는 것이다.

처음엔 나도 깜짝 놀라 카드활성화를 off로 바꿀 것과 충전된 엔화를 전부 환불할 것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환불은 진작 다 했다는 것이 아닌가.

무언가 이상했다. 트래블월렛 카드는 충전하지 않으면 원화 계좌에서 곧장 결제가 되지 않는다. 충전한 만큼만 사용할 수 있어 무분별한 결제에 대한 염려 없이 만들어온 것인데… 정황상 충전을 한 게 분명해 보였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카드의 주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의 휴대폰에서 트래블월렛 어플을 확인해보니 충전 기록이 있었고, 원화 계좌에서 빠져나간 금액이 트래블월렛 계좌에 고스란히 엔화로 바뀌어 남아 있었다.

처음 해보는 경험이 재미있었는지, 자신도 할 수 있다는 뿌듯함에서였는지 여행 중에도 자꾸 충전을 하던 아이였는데, 여행이 끝난 후에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곧장 환불할 수 있어 큰 손해 없이 끝이 난 귀여운 소동이었다.




여행 5일 차 오전 10시 30분, 가이유칸


아침식사는 전날처럼 동네 식당을 이용했다. 숙소를 깔끔하게 정리했기 때문에 또다시 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함이었다.

아침식사를 하는 중에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단체복을 입고 무리 지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 둘 보이던 단체가 꽤 여럿이 되었을 무렵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저들의 목적지가 우리와 같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우리의 마지막 일정은 가이유칸 수족관이었다. 아이들이 아쿠아리움을 좋아하기도 하고, 마침 가이유칸은 숙소에서 도보 5분 거리로 가까웠다.

4박 5일을 꽉 채울 수 있도록 오후 4시 비행기를 끊다 보니 짐을 들고 돌아다녀야 하는 귀국일 일정이 걱정이었는데, 마침 가이유칸에는 물품보관소가 있었고, 또 바로 옆에서 간사이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탈 수 있었다.


무난할 것이라 예상한 일정은 뜻밖의 인파에 삐걱거렸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 체크아웃을 하고, 걸어서 가이유칸에 도착했을 때는 매표소 앞에 늘어선 줄이 한가득이었다.

가이유칸은 할인 여부를 알 수 없어 미리 예매를 하지 않았다. 홈페이지에는 장애인 할인과 학교 단체 할인이 모두 안내되어 있었지만 우리에게도 적용되는지 장담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할인이 가능하면 받아보고자 현장 티켓팅을 시도한 것인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예매를 하고 갈 걸 그랬다. 장애인 할인은 일본인이 아니어서, 단체 할인은 성인이어서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게다가 티켓을 끊고 보니 시간대별로 입장인원이 제한되어, 우리의 입장시간은 무려 50분 뒤였다. 미리 알았더라면 먼저 일찍 와서 티켓을 끊었을 텐데 싶었으나 이미 늦은 걸 어쩌랴.

원래는 관람 후 근처에서 점심식사까지 마치고 공항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는데, 계산을 해보니 시간이 촉박했다. 그래서 우선 공항으로 이동하여 탑승수속을 하고 식사를 해결하는 것으로 급하게 일정을 변경했다.


캐리어는 물품보관함 대신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고, 교사 1명이 지키기로 했다. 보관함 이용금액이 생각보다 비쌌고, 단체로 온 관람객들을 보니 죄다 물품보관함 대신 건물 앞에 짐을 줄 세워놓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안이 좋은 나라의 사람들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치안이 좋은 대한민국에 익숙한 우리는 별 걱정 없이 바깥에 캐리어를 놓고 입장했고, 무사히 다시 챙겼다.


입장시간을 기다리며 1층에 위치한 스타벅스와 기념품 가게를 구경했다. 점심은 관광입장료를 절감한 비용으로 지원해 주기로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마음껏 용돈을 탕진했다.

그래봤자 남은 돈을 사용하는 거라 탕진이라 부르긴 어렵지만 내내 아껴 쓰길 강조하다 잔소리를 하지 않은 유일한 시간이었다.


새삼 카드를 만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 남은 현금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혼자서 계산할 수 있는 아이들이 몇 없었다.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대부분 수 개념이 취약한 데다, 돈 계산이 가능한 아이들도 낯선 엔화를 계산하려니 도움이 필요했다. 심지어 엔화는 동전이 많아서 더 어려웠다.

계산대에 교사들이 붙어 서서 잔돈을 소모할 수 있도록 일일이 세고 확인해 준 끝에 다들 문제없이 결제를 할 수 있었다.

가이유칸에서 만난 해양생물들

50분이 길어 보였는데 캐리어를 정리하고 음료와 기념품을 사는 사이에 금방 입장시간이 되었다.

가이유칸은 일본 내 3위권에 드는 오사카 최대 수족관으로, 고래상어가 유명하다. 회랑 형태의 통로를 따라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펭귄, 고래, 가오리, 해파리 등 다양한 해양생물을 만났다.

개인적으로 동물원이나 아쿠아리움 등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데다 기대보다 작은 규모에 다소 실망스러웠으나 연신 신기해하며 열심히 사진과 영상을 찍는 아이들을 보자 그런 마음은 한 편으로 밀려났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면 많은 것들이 대개 괜찮아진다.


아쿠아리움을 좋아한다던 한 아이는 길고 어려운 이름들을 줄줄이 외워댔다. 나는 글을 쓰려고 다시 떠올려봐도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을 헷갈리지도 않고 외우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3년을 보면서도 몰랐던 능력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것도 재미있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모르던 모습들을, 다양한 행사와 활동들을 하다 보면 알게 된다.

앞으로 더 넓은 세상과 마주하게 될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고민하고 교육하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경험들이 필요하다.




가이유칸 관람을 끝내니 12시 30분 무렵이었다. 마침 12시 53분에 간사이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가 있었다.

덴포잔 대관람차 앞 공항리무진 정류장

공항 리무진은 실물 티켓을 왕복으로 구매를 해왔기 때문에 따로 발권이 필요하지 않았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원래 동네가 그런지 리무진 탑승객은 많지 않았고 한꺼번에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이번에는 공항에서 탈 때와 다르게 캐리어마다 번호표를 부착하고 꼬리표를 떼어줬다. 첫날 탑승권을 잃어버린 경험을 떠올리며 일괄 걷어서 보관했는데,내려서 짐을 찾을 때 일일이 번호를 확인, 대조하고 주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다른 탑승객들이 다 떠나가고 우리 일행과 짐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번호를 확인하지 않고는 짐을 내주지 않던 완고한 직원들 덕분에 순서 없이 섞인 스물네 개의 짐과 번호를 맞추느라 한참이 걸렸다.

그냥 각자에게 나눠줄 걸 그랬다 싶다가도, 이번에 표를 잃어버렸다간 짐을 못 찾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겠지만 한 번 경험을 했으니 다음에는 더 나은 대안을 고민해 봐야겠다. 경험 속에서 성장하는 건 아이들만이 아니다.


여행 5일 차 오후 2시, 간사이공항


짐을 찾고 체크인을 했다. 간사이공항은 셀프체크인 같은 시스템이 없고, 짐 검사에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탑승 한 시간여를 남기고 겨우 안으로 들어갔는데 문을 연 가게와 식당이 거의 없었다. 입국할 땐 꽤 큰 공항이라고 생각했는데, 출국장은 매우 작은 규모였다.

선택의 여지없이 우동과 초밥으로 점심을 먹고, 이코카 카드의 잔액으로 음료수도 알뜰하게 사서 마셨다. 교통카드로 편의점이나 자판기 등을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은 우리나라와 비슷해서인지, 가르쳐주기도 전에 이미 사용하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작은 것도 기특해 보이는 것은 새로운 환경에서 기대보다 더 적응을 잘 해준 아이들 덕분일 터. 무사히 4박 5일을 보내준 아이들이 참으로 고맙고 기특했다.


한국 검역절차인 Q코드는 공항으로 오는 틈새에 입력했다. 세관신고서는 5월 1일부터 규정이 변경되어 신고할 물품이 없으면 작성하지 않아도 됐다. 우리에겐 너무 다행인 일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여러 번 서류를 작성해 본 아이들에게 Q코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절차였다. 링크를 보내주자 입력부터 다운로드까지 착착 해냈다.

자신만만한 아이의 답변

혼자 입력이 어려운 아이들은 대신 입력하고 QR코드 사진을 저장하게 했다.


“교수님, 해외여행은 해야 할 게 많네요.”


한숨을 푹 쉰 아이도 있지만 그건 어렵다는 투정보다는 그럼에도 스스로 해냈다는 자부심이었다.


여행은 끝의 끝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공항에서 제각각 귀가방법을 확인하고 헤어지자마자, 혼자 공항버스를 타고 간다며 당당하게 인사했던 아이가 울상이 되어 나타났다.

사연인즉 비행시간이 지연되어 놓칠까 봐 사전에 시간대별로 두 대의 공항버스를 예매했고, 탑승시간에 맞춰 나머지 하나를 취소하려다가 실수로 두 장을 모두 취소했다는 것이다. 다시 예매하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티켓이 모두 매진되어 버렸고, 남은 버스는 2시간 반이나 기다렸다 타야하는 버스라 당황한 아이가 우리를 다시 찾아왔다.

제 실수에 혼이 날까 걱정하는 아이와 다시 티켓을 끊으며 다독였다.


“괜찮아, 실수할 수도 있어. 그다음 표를 끊으면 돼. 그리고 오늘의 경험을 잘 기억했다가 같은 실수를 또 하지 않도록 더 조심하면 되는 거야.”


순탄하기만 한 여행도, 순탄하기만 한 인생도 없다. 문제에 부딪혀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운다. 해결 못할 것이 두려워 문제를 피하면 아이들은 성장하지 못한다.

우리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실패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우리의 여행은 완벽하지 않았으나 충분히 멋지고 성공적이었다.


“어때? 다음에는 너희들끼리 올 수 있을 것 같아?”


여행을 마치며 지도도, 번역기도, 배운 대로 제법 능숙하게 사용하던 아이들에게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이는 이내 자신 있게 말했다.


“숙소만 구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도 여행 전에는 반신반의하며 그저 희망으로만 남겨두었던 바람인데, 실제 여행을 하고 나니 몇몇 아이들은 정말 가능할 것 같았다. 낯선 곳을 혼자 탐색하고 여행하기는 어렵겠지만 오사카를 다시 오는 거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취업하면 월급 모아서 꼭 다시 도전해 봐.”

“그럴게요.”


시원시원하게 답하는 아이의 눈은 여느 때보다 생기발랄했다.

조기취업을 하고 3년 여를 8시간씩 근무하다 자진퇴사를 하고, 최근 학교에 다시 편입을 한 아이였다. 취업 초기의 의욕을 잃고 직장생활에 지쳐 돌아온 아이에게 오사카 여행은 다시금 취업에 대한 동기부여가 된 듯했다.


삶이 즐겁고 행복해야 살아갈 의미도, 일을 할 의욕도 생긴다. 긴 인생에서 4박 5일은 지극히 짧은 시간일 테지만 이 여행의 기억이 아주 오래도록 너희들의 삶을 풍요롭게 채워주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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