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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안 Apr 15. 2023

한때 당신의 전부였던,
기숙학원 이야기 2

02. 버려지는 아이들 1

나는 김치찌개를 좋아한다. 


 김치찌개의 새콤하고 짭조름한 국물. 그 특유의 신맛을 좋아한다. 두부를 넣으면 두부가 찌개의 국물을 머금어 밥과 잘 어울리는 최고의 반찬이 된다. 찌개를 먹으면서 두부조림까지 먹을 수 있다니, 실로 놀랍지 않은가? 이같이 김치찌개는 첨가하는 부재료에 따라 성(姓)을 달리한다. 참치를 넣으면 참치 김치찌개. 돼지고기를 넣으면, 돼지 김치찌개. 꽁치나 스팸을 넣으면 각각 재료의 이름을 앞에 넣어 꽁치 김치찌개와 스팸 김치찌개가 된다. 김치찌개의 이런 면이 난 좋았다. 김치찌개 본연의 색은 지키되 함께 끓는 모든 재료를 이름에 포함 시키는 그 넓은 포용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가끔 김치찌개는 어머니가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보다는 자신이 품은 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자애롭고 따뜻한 어머니. 어머니의 이름보다는 자식의 이름을 앞에 넣어, 누구 엄마 누구 엄마 하는 어머니의 이름 같아서. 참고로 나는 두부 엄마보다는 참치 엄마를 더 좋아한다.     

 나는 김치찌개만 있으면 밥을 두 그릇이나 해치울 수 있다. 한참 때는 밥을 세 그릇까지 싹싹 비운 적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난 김치찌개의 미묘한 신맛이 좋았다. 김치찌개 특유의 신맛을 내기 위해선 갓 담근 김치 보다는 어느 정도 발효된 신 김치를 넣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난 김치를 먹지 못한다. 잘 못 들은 것이 아니다. 나는 김치를 먹지 못한다. 안 먹는 것이 아니라 딱 잘라 말해서 못 먹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 같이 내가 농담을 하는 줄 안다. 김치찌개는 먹지만 김치는 먹지 못한다. 내가 들어도 웃기지도 않은 농담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김치찌개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김치 편식인’이다.


 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편식을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치찌개의 맛을 알게 된 것도 군대를 전역한 이후의 이야기다. 편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아는 보편적인 단어에 속하지만 편식을 경험하는 나 같은 사람은 죽도록 피하고 싶은 꼬리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편식 쟁이. 왜 전 세계의 아이들은 채소나 야채 따위를 싫어하는 걸까? 브로콜리, 오이, 파, 양파, 파프리카, 당근, 무, 배추, 시금치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소시지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도 인간은 육식을 위해 태어난 육식 동물이지 않았을까? 단지 조금 더 건강히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채소와 야채를 먹는 것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자연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라고 전 세계 편식인을 대표해 소심하게 반항해본다. 지금도 성장기에 접어든 수많은 어린이들이 “편식하는 아이” 라는 불명예를 얻는다. 얻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얻어지는 사회적 신분. 편식 쟁이는 태생적인 신분 때문에 부모에게 혼이 나거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할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손 가락질 당하는 일은 다반사다. 건강을 위해서 젖을 떼고, 이후부터 골고루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지만 어린 시절 편식은 나의 깊은 내면에 남모를 깊은 상처를 남겼다. 역시나 편식은 건강에 좋지 않다. 정신건강에. 나에게 편식을 한 단어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나는 단번에 “고통”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휘를 몇 개 더 써 보자면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고통”, “음식 자체가 싫어지는 능력”, “남들 눈치를 보게 되는 장애” 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남들에게 말 그대로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비치는 듯했다. 어린 시절 놀림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김치를 억지로 먹어보라며 냄새를 맡게 하는 일은 약과. 입으로 씹어서 넘겨받아 눈치를 보며 우격다짐으로 삼키는 경험도 여러 차례 있었다. 나 딴에는 패기를 부린답시고 꿀꺽 물과 함께 목으로 넘긴 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물론 의지만으로 편식이 해결되진 않았다. 우격다짐으로 삼켜진 김치는 살아서 장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저주받은 나의 위가 멱살을 잡고 하늘 위로 끌어 올렸다. 해로운 병균이 몸에 들어온 것 마냥, 온몸이 나에게 거부감을 표했다. 언제나 그렇듯 덜 소화된 음식은 다시 신선한 공기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덜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식 자체가 살아가는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나에게 편식은 문화의 문제였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경험해야만 했던 억울하고 창피한 경험이었다. 지금도 내 몸이 왜 김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그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았다. 미스터리 유튜브 채널을 보면 과학의 발전으로 세기의 불가사의들이 풀리기 시작하던데, 내 몸 안의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은 상태로 꿋꿋이 내 주변인들에게 불가사의한 호기심을 만들어 낸다. 뭐 세계 8대 불가사의도 몇 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나 진실이 밝혀졌으니, 편식 미스터리도 수 세기는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다. 불행하게도 몇 천년의 기다림을 부모님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부모님께 편식은 미스터리의 영역이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방학. 나는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에 자리 잡은 아버지의 본가. 깡촌이라 불러도 무방한 시골 큰집에 보내졌다. 귀양살이의 죄목은 편식.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큰집에서 편식을 고쳐 돌아오는 것. 


나는 그렇게 억울한 누명을 쓴 중죄인이 되어 깡촌에 버려졌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학습이 느렸던 건지, 방학의 시작과 함께 들린 큰집에서 ‘헤헤’ 거리며 웃다가 저녁이 되면 홀로 남겨졌다. 수차례나 말이다. 귀양살이의 서막은 이러했다. 방학 첫날 가족들이 모두 모여 큰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대뜸 아버지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큰집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명절에만 들렸는데, 학습이 느린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큰집에서는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를 위해 거의 나물이나 채소 위주의 반찬만 먹었다. 웬일인지 그날은 큰집 밥상에 내가 좋아하는 소시지 반찬이 놓여 있었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 분명했다. 통통하게 구워진 천국의 반찬에 나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것이 함정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 초등학생이 뜨거운 김을 술술 풍기는 줄줄이 비엔나를 마다하겠는가? 나는 정신없이 소시지를 먹어 치웠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버지의 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방 안에는 “편식쟁이” 나만 홀로 남겨져 있었다. 나는 수저를 던지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버려진다는 감각을 몸에 익힌 어린 국민 학생은 신발도 신지 않고 흙길을 내 달렸다.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엄마, 아빠, 누나, 형이 탄 차를 쫓아 달리고 또 달렸다. 가엾디 가여운 맨발의 편식쟁이를 발견한 건지 저 멀리서 아버지가 차를 세웠다. 나는 큰집에서 50미터가량 떨어진 다리에 도착했다. 손에 천 원짜리 한 장이 쥐어졌고, 차는 다시 출발했다. 나는 포장이 덜 된 도로 옆 풀밭에 홀로 서 있다. 저 멀리 사라져가는 아버지의 짙은 푸른색 포터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제 나는 약 한 달 동안 동네에 슈퍼 하나 없는 깡촌에서 천원짜리 한 장만 들고 버텨야 한다. 발에 박힌 작은 돌맹이들을 쓸모 없는 천원짜리로 툭툭 털어냈다.     


 어느새 방학의 끝자락이 다가왔다. 운동장에는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게 만드는 각종 외제차들이 오후의 햇살을 반사한다. 고유의 엠블럼을 자랑스럽게 반짝인다. 단 몇 분 만에 기숙학원 운동장은 벤츠, 아우디, BMW, 포르쉐 등의 고급 외제차 전시장이 된다. 나는 처음 이 광경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언제부턴가 외제차는 부의 상징물이 되었다. 나 때만 해도 외제차 보기가 흔치 않았는데, 요즘은 어느 지역을 가든 외제차가 섭섭지 않게 눈에 들어온다. 한국이 뉴스에서처럼 잘 사는 나라(나는 느껴보지 못했지만)가 됐다는 증거일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각종 외제차들이 이렇게 한 공간에 주차된 모습은 놀랍기 그지없다. 즐비하게 늘어선 부의 상징물들 안에서 슬픈 눈을 가진 아이들이 하나 둘 내린다. 나라가 잘 살게 되건 말건 자신들의 행복과는 무관하다는 표정이다. 나는 잠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부유 하다고 해서 다들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형식적이었던 말이 떠오른다. 상대적 위로가 나를 감싸는 동안 아이들은 부모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펑펑 우는 아이들도 있고, 애써 덤덤한 척 손을 흔드는 아이들도 있다. 단 한 번도 집을 떠나 본 적 없는 아이들이 군에 입대하기도 전에 남녀를 불문하고 생에 처음으로 가족과 생이별을 맛본다. 나는 전쟁 통에 가족을 잃는 슬픔이 이와 비슷한 감정이지 않을까? 하고 어렸을 적 큰집에 보내질 때의 감정을 떠올려 본다. 


어린 시절 편식쟁이 나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안쓰럽고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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