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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덩이 Apr 08. 2023

은행을 그만두기로 했다 3

퇴사의 이유

은행 퇴사의 마지막 이유이자 세 번째 이유를 설명할 시간이다. 첫 번째는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설움이고 두 번째는 버거운 책임의 무게였다. 사실 세 번째 이유는 이 둘의 결정체라 할 수 있겠다. '은행'하면 가장 많이 엮이는 단어가 무엇인가? 바로 민원이다.



셋째, 고객과 행원의 힘의 차이가 민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물론 정상적인 민원도 많다. 행원이 정말로 큰 실수를 해서 대출을 그르치거나 수수료가 더 많이 나갔거나 하는 경우에는 업무에 대한 불만으로 민원을 넣을 수 있다.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피해 갈 수 없는 게 그 민원이다. 실수에 대한 정당한 민원은 당연히 사과를 드리고 혹시나 정말로 손해가 발생한 경우에는 책임자 협의 하에 금전적 보상을 드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든 민원이 정당하지는 않다. 스스로의 착각과 오해로 단순 민원을 넣는 고객도 있고 본인의 실수에 대해 남 탓을 하기 위해, 또는 보상을 받기 위해 억지로 민원을 넣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이 있겠어? 하겠지만 생각보다 많다. 민원이 들어올 이유가 없는데 민원 메일을 받은 직원들의 황당한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극단적인 케이스로는 ATM 기기 사용 중 감기에 걸린 것 같다며 본인 건강에 대한 배상을 원하는 고객도 있었다. 


나의 경우에는 고객이 잔금을 치르는 날 대출이 나가고 일주일 전 심사를 마친 상태에서 가산금리를 알려주고 실행 당일 기준금리에 따라 최종 금리가 변경된다 고지했는데 대출 실행 다음날 금리가 이렇게 오를 줄 몰랐다며 민원을 받았다. 최종금리는 기준금리와 가산금리로 이루어진다. 가산금리의 경우 심사가 끝나면 숫자가 유지되는데 기준금리의 경우에는 매일 바뀌기 때문에 정확한 금리를 미리 안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렇기에 최종금리가 당일 기준금리에 따라 변경된다고 더욱 신경 써서 안내한다. 그 고객에게도 여러 번 설명했지만 그는 내가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능력이 있고 금리가 오를 줄 알고 있었으면서 속였다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리고 그는 가산금리를 깎아서라도 일주일 전 금리로 낮춰달라 생떼를 부렸다.


단순 민원이든 억지 민원이든 정당하기만 하면 무시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웠다면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지도 않았을 거다. 민원은 지점의 KPI와 직결된다. 나 하나가 민원을 받고 그 민원이 취하되지 않으면 지점 전체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말이다. KPI에 따라 지점 등급이 결정되고 동료들의 카드 하나, 청약 하나가 만든 실적이 반영된다. 최종적으로는 성과급 자체가 달라진다. 그런데 직원 하나가 민원을 받아봐라. 순식간에 죄인이 된다. 카드 수십 개와 청약 수십 개가 만든 실적이 깎인다.


그렇기에 행원들은 잘못이 없어도 고개를 숙인다. 부당한 대우에도 말대꾸 한 번 못한다. 고객을 얼러 달래고 억지웃음을 보이고 과격한 행동에도 눈 감는 이유다. 고객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민원이 무섭고, 그로 인해 나와 동료와 지점 전체에 끼칠 영향이 무서워서다. 기억을 잃어가는 할머니가 돈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젊은 청년이 개인적인 분풀이로 쌍욕을 해도 속으로 삭이는 게 일상이다. 


오해가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정당한 민원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에 맞는 사과를 하는 게 맞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부당한 민원에 대한 부당한 대처다. 그리고 그런 부당한 민원에도 행원들의 손발을 묶어놓는 무력한 은행 시스템에 대한 고발이다.


옛날 일 하나가 떠오른다. 수신계 행원이 민원을 받았다. 자세한 내용이 기억나지도 않는 단순 민원이었다. 고객이 그 행원 말하는 게 싹수가 없다며 삿대질을 했고 그 행원은 말로는 그런 게 아니라 무마했지만 눈빛은 숨길 수 없었나 보다. 살벌한 기싸움이 이어지고 나중에는 지점장 나오라고 한참을 버티다가 돌아갔다. 그리고 민원을 먹인 거다. 정확한 증거나 실제 손해는 없는 케이스다. 업무 실수도 아니었다. 그냥 눈빛이 그래서, 말투가 재수 없어서. 기분 나쁠 일이지만 직접적으로 남는 증거가 없다. 고객의 오해일 수도, 행원의 실책일 수도. 그 행원은 민원을 받고 취하해야겠다는 생각에 고객에게 전화로, 문자로, 실제로 방문해서까지 사과를 했다. 사과에 진심이 안 담겨있다는 말만 남기고 고객은 고개를 돌렸다. 결국에는 죄 없는 팀장님이 똑같이 전화로, 문자로, 방문으로 사과를 전했고 팀장님의 선물을 끝으로 고객은 민원을 취하했다. 이 건으로 그 행원도 팀장님도 고생을 참 많이 했다.


대놓고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민원도 많다. 보통 금액이 크지 않으면 행원이 아무리 억울해도 책임자 쪽에서 "주고 끝내버려"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괜히 마음 고생하고 지점에 피해를 주느니 소액의 보상과 억울한 고개 숙임 한 번이면 끝낼 수 있는 일이란 거다. 

사람과 돈이 엮이면 이렇게 영혼이 말라간다. 
존엄성을 잃고 기계처럼 영혼 없이, 인간성이 죽어간다.
눈과 입은 웃지만 그 속에 나는 없다.


어떤 직장이든 비슷하다는 게 어른들의 말이지만 비슷하게 힘든 일들 속에서 그나마 나 자신을 유지하고 싶었다. 상사에게 비난받고 직급 경쟁 속에서 허리가 휘는 건 어느 직장이든 똑같다. 그러나 은행은 동일한 시스템에 고객에 대한 압박과 돈에 의한 책임이 더해진다. 아무리 월급을 많이 받는다 해도 행복하지 않으면 그게 의미가 있을까. 조금은 더 행복하고 싶었다고 얘기한다면 치기 어린 욕심인 걸까.


그래서 나는 은행을 다니는 중에 다른 길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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