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책상 세 개가 레고 조각처럼 딱 맞게 들어간 사무실이었다.
내 자리는 문 옆 벽에 바짝 붙은 책상, 텀블러나 물컵을 올려두곤 작업이 불가능했다.
숨 쉬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두 평짜리 공간엔 당연히 창문도 없었다.
문을 열어도 맞은편 사무실 문이 보이는 2인실 공유오피스였다.
면접 볼 때 나에게 보인 사장 부부의 공손함과 집에서 자전거로 15분 거리에 있는 위치가 맘에 들어
함께 일해보자고 했을 때 흔쾌히 출근하겠다고 했었다.
공유오피스에 대해 잘 몰랐다. 적어도 작은 창문과 서로의 적당한 거리는 유지되는 사무실일 거라고
내 맘대로 추측했었다.
회사라고 말할 수 도 없는 규모의 조직이라 쓸데없는 신경전이나 형식 없이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이것 또한 내 맘대로 추측했었다.
이건 모두 고용되는 나의 입장에서만 그려낸 나의 희망회로였다.
그들과 나는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걸, 그래서 보이는 풍경도 다르고, 희망회로도 다르게 돌리고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생각하기 싫었다. 나는 서울에서 너무 먼 파주로 이사를 왔고, 집도 샀고, 곧 입주를 앞두고 있고, 어찌되었든 여기서 벌이를 찾아야 했고, 근데 주변엔 온통 공장들 뿐이고… 일산 나가는 것조차 1시간 이상 소요되는 이곳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회사란 맘의 각오를 했던 것 보다도 더 적었다.
그렇게 혹시나 하는 마음과 버텨보자는 마음을 섞어 출근을 한 첫날부터 힘에 부쳤다.
뜨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사대보험과 휴가, 점심 식대에 관해 먼저 출근해서 업무 인수를 해주고 있던 남편 사장에게 문의를 했다. 돌아온 대답은 와이프가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 였다.
그 후 업무 설명이 이어졌다. 업무를 나눈 엑셀표를 보여주는데 파트별로 촘촘히 나눈 엑셀표엔
대부분 내 이름만 들어가 있었다. 디자이너를 뽑는데 이렇게 많은 채널 운영에 사이트 관리에 고객응대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넣어놓았구나.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런 인수인계 중에 와이프가 왔다.
와이프사장은 심드렁하게 인사 후 남편사장과 근로계약서를 작성했다. 나의 바로 옆에서 작성하는
사장부부의 근로계약서 타이핑 소리는 경쾌하지 않았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내가 두어 번 말하고 나서야 돌아보는 남편사장, 남편사장이 톡톡 치자 그제야 돌아보는 와이프 사장에게 말했다.
’ 아무래도 같이 일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저희가 너무 열악한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와이프는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반문했다.
시작하는 부부사장단에게 나쁜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들도 그 안에서 나름 공간을 만들어 보려 노력했겠지.. 싶었다.
책상도 너무 좁고 사무실도 최소한의 거리감도 유지되지 않아 근무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환경적 문제로 너무 큰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다고 했다.
’ 저희가 아직 상의한 건 아닌데 제 생각이긴 한데… 재택근무 어떠세요? 일주일정도만 인수인계받으시고 재택근무로 돌려 드릴게요.’
생각 못한 제안에 좀 놀랐었다. 결국 알았다 하고 다시 일하기로 했다. 퇴근할 때 근로계약서는 작성 중이라며 내일 오시면 사인하자고 하길래 알았다고 했다.
두 번째 날 느지막이 온 와이프는 나에게 근로계약서를 내밀었다. 조항을 읽어주는데, 급여에 대한 항목에 회사 사정이나 기여도에 따라 협의하에 급여를 증감 조정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이 조항은 뭔가요? 이런 조항은 근로계약서에서 처음 보는 조항이네요.’
‘그럼 뺄까요?’ 하고 와이프사장이 서류에 엑스자를 쳤다.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리곤 또 읽는데 신규입사자는 한 달의 수습기간이 있고, 급여는 80%만 지급된다고 쓰여있었다.
‘디자이너님은 실력 있으신 거 같고, 경력자시니 그냥 이건 해당 안될 것 같아요. 신규입사자라 쓰여있는데 신입 아니시니까…’
신규입사자의 뜻의 모를 리 없을 텐데 말장난처럼 느껴졌다.
‘근데.. 위에 급여 이 조항도 그냥 두면 안 될까요? 저희가 앞으로도 직원을 뽑을 텐데 근로계약서의 이 내용 수정하면 다음에 다시 또 수정해야 하고 그럼 헷갈릴 것 같아서요. 디자이너님에겐 다 해당 안 시킬게요. 그냥 루틴 한 내용들이 이니까 그냥 해주시면…’
처음부터 한마디도 납득되질 않아, 어디서 부터 문제를 삼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피곤함이 너무 몰려와 그냥 그러시라 했다.
재택근무도 근로계약서 조항에 없었다.
‘일단 근무지는 회사 주소로 써놓았고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재택근무 내용은 넣지 않을게요.’
그러시라 했다. 기가 찼다.
‘저작권 조항은 저희 회사에서 만드신 건 모두 저희 회사 소속인 거.. 솰라 솰라..’
‘네 뭐 당연하죠..‘ 이쯤에선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본인들에게 유리하고 중요한 조항들은 꼼꼼하게 세세하게 다 박아 두었다.
나에게 중요한 내용들은 다 말뿐이었다. 약속받은 근무조건 중 서류로 증명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왜 시작하는 조직은, 너무 작은 조직은 정직할 거라 생각했을까…
서류로 보장받은 근무조건이 아무것도 없기에 그들의 말에 기대야 했다. 그들의 선의에 의존해야 했다. 그래도 일을 해보려고 했었다. 여기서 나의 스킬도 키우고 그들에게도 도움 되면 괜찮지 않을까?
라며 안에서 나오는 불안감을 눌렀다.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와이프는 나에게 이번주는 점심을 사드리겠다고 했다.
’ 저희가 일주일은 식대 내 드릴게요. 솔직히 한 달 내내 사드리긴 저희도 부담되고요.ㅎㅎ‘
뭔 소리지…. 일주일 근무 후 재택을 하라고 했었는데… 왜 갑자기 한 달 치 식대얘기가 나오는 걸까…
그냥 말 실수려나? 싶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차도 마시고 일을 하는 내내 근로계약서가 마음에 걸렸다. 점심에 했던 식대얘기까지…
내가 출근한 이틀 동안 이들의 태도를 곱씹어 봤다. 예전에 들었던 어떤 인문학 수업에서 강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여러분 상대방이 헷갈릴 때는 그 사람의 태도만 보세요.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말은 그냥 할 수 있어요. 태도가 진짜예요. 태도만 보면 모든 게 투명해져요.’
그들의 말을 걷어내니 부부사장단의 속내가 너무 투명하게 보였다.
퇴근시간 전 나에게 거래처에서 받은 공짜 과일을 주며 큰 걸로 골랐다고 너스레 떨던 와이프를 보며 생각했다. ‘당신들이 나에게 망설임 없이 제공할 수 있는 근무조건은 딱 이 정도군요. 공짜로 받은 물건을 망설임 없이 줄 수 있는 정도‘
퇴근하며 돌아오는 길 나에게 신호를 줬던 그들의 여러 행동들이 떠 올랐다.
제품 홍보내용에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 거짓말인데.. 그냥 넣어요.‘라고 말했을 때도,
다들 이렇게 해요. 라며 노하우를 말해주듯 이야기하던 것들…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를 착취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
그러기엔 그들에겐 안정적인 다른 사업체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나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붙일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는 얼마든지 있지…
다음날 오전 나는 근무가 불가하다는 문자를 남겼다.
그들의 모든 것이 너무 경악스러워 구체적인 퇴사 사유를 말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알려주고 싶지도 않았다. 같은 방식으로 계속 살아가길…
이 정도에서 끝낼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또다시 실패해서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시 막막하고, 막연한 길 위에 놓여 있지만 그들 덕분에 가지 말아야 할 길은 조금 더 선명해졌다.
당신들이 걷는 그 길이 천국처럼 포장된 지옥이길, 지금처럼만 치졸하고 지저분한 인간으로 늙어가길 희망한다.
상처받고 다시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고 싶다.
나는 아직 일할 나이이고, 일 할 수 있는 나이다. 나의 일을 찾는 여정이 마흔이 넘어 계속될 줄 몰랐다.
역시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안정된 나이란 없다는 걸 절감하는 중이다.
그래도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상처받은 무기력해진 내 마음을 다독이며 오늘도 나의 일을 찾아 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