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모두 등교한 아침. 추워진 날씨 탓에 옷을 정리하다 첫째 옷장 구석에 박힌 인형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좁은 옷장에서 꽤 큰 공간을 차지하는 인형 박스가 2년 전 이사 후로는 관심받지 못한 채 그대로 있었다. 박스를 빼서 옷장 공간을 확보하고 인형은 일단 비닐에 담아 현관에 두었다.
"엄마, 인형 왜 다 뺐어?"
"아, 인형 정리 좀 하게. 필요한 것은 빼놔. 필요 없는 것은 버릴게."
하교한 딸에게 인형을 정리하라 했으나 1주일이 흘러도 그대로 둔다. 토요일 밤이 되니 현관 앞에 쌓여 있는 인형이 보기 싫어서 주말까진 정리하자고 재촉했다.
"엄마! 나 이거 하나면 돼!"
몇 분 지나지 않아 한마디를 건네며 인형을 들고 왔다. 이사 오기 전에 1차로 버리고, 호주, 베트남, 일본 등 여행 가서 사 온 인형, 긴 줄에서 꽤 오랜 시간 기다려 사 온 벨리곰, 크리스마스 산타가 준 포켓몬스터 인형 등 아이가 특히 좋아했던 인형들만 남아 있었다. 고르는데 고민되겠다 싶었는데, 그리 쿨하게 하나만 고르다니.
양쪽 귀가 쫑긋하지 못한 채 한쪽이 비스듬히 쳐진 오래된 토끼 인형. 첫째가 그 인형을 들고 다시 자기 방으로 사라지는데 인형에서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 첫째 임신 했을 때, 여동생이 첫 조카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방울을 넣어 바느질로 만들었고, 갓 태어난 딸에게 선물로 준 인형이라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방울 소리는 변함없다.
여동생의 조카 사랑은 이모를 최고라 여길 정도로 차고 넘쳤다. 양가 부모님께 아이를 맡길 형편이 안 되었던 내게 잠깐이라도 아이를 맡기고 남편과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여동생이었다. 미혼의 여동생이 갓난아기를 돌보기가 쉽지 않음에도 기저귀를 갈고 이유식을 먹이는 것부터 하나씩 익혀가며 모두 케어해 줬기에 마음 설레는 외출을 할 수 있었다.
딸이 4돌즘 되자 이모랑 자고 오겠다며 하룻밤씩 짐 싸서 나갔고 이모랑 계획을 세워 종일 놀고 같이 샤워도 하며 즐거워했다. 평소엔 이모에게 수시로 영상 통화를 걸었고 심지어 조개 캐러 갔을 때도 진흙 잔뜩 묻은 손에 핸드폰을 아슬하게 쥐고 조개를 들어 보이며 갯벌 한가운데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사랑은 계속 이어져 5학년 때 이모랑 단둘이 3박 4일 제주도 여행을 갔고, 한라산 등정을 원했던 딸의 바램을 이뤘다. 백록담 코스를 하루 잡아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이모랑 한라산 정상을 다녀오며 잊지 못할 힘든 시간을 함께 했다.
이모에 대한 이런 사랑은 사춘기가 되면서 점점 식어 가는 듯 보였다. 영상통화는 물론이고 톡으로 대화도 거의 없다. 이모랑 같이 목욕하는 걸 좋아했던 아이가 이젠 잠옷 차림으로 이모에게 인사하는 것도 부끄럽다는 듯 서둘러 옷을 갈아입는다.
식은 줄 알았던 이모에 대한 딸의 마음을 이번에 다시 알게 된다. 정말 다른 인형은 필요 없냐고 재차 물었지만 아이는 고민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꺼내진 토끼인형을 세탁기에 돌려 햇볕에 소독시키는 동안 여동생에게 사진 찍어 보내며 스토리를 설명했다. 이모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는 네 번째 퇴학을 당한 홀든이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짐을 싸는 장면이 나온다. 학교를 떠나는 슬픔은 없는 듯한 홀든이었지만 순간 그를 우울하게 만드는 물건이 있다. 불과 며칠 전에 엄마가 사서 보내 준 스케이트! 비록 엄마가 스케이트를 잘못 사서 보냈지만 스케이트를 사기 위해 점원에게 얼마나 많이 물어봤을지를 상상하며 홀든은 슬퍼했다. 전형적인 학교 교육에서 낙제점을 받아 여러 차례 퇴학을 당한 사춘기 소년이지만, 직접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엄마의 행동을 떠올리며 마음을 읽어 내려가는 심해력이 있었다.
단지 표현하지 않을 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님을 아이가 고른 토끼 인형이 내게도 알려준다. '애들은 다 알아야. 누가 자기 좋아하는지.' 어쩌면 어린아이들보다 혼란 속 사춘기 아이들이야말로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음을 더 크게 간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에 만난 동창도 비슷한 말을 했다. 대학생이 된 첫 조카가 자신이 보낸 편지를 모아 사진 찍어 보내줬는데 그걸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조카에게 그렇게 많은 편지를 써 줬다는 것에 자신도 새삼 놀랐다고.
사랑은 형태는 없지만 느껴지고 쌓여간다. 충분히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전해주고 그 느낌을 지켜주는 엄마이자, 이모이자, 동네 아줌마, 그리고 할머니가 되고 싶다. 아이들 스스로가 자신은 사랑받는 사람임을 알고 변함없는 방울 소리처럼 솟아나 위안이 될 수 있게 우리가 아이들의 파수꾼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