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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쁜파크 Oct 27. 2023

라면도 잘 못 먹는 딸이 마라탕 집에 간다.

<와일드 후드>


주말에 약속이 있어 외출하고 돌아온 딸에게 밥은 잘 먹었나 물었다.

"마라탕집 다녀왔어."

"어제도 마라탕 먹었다고 하지 않았어? 설마 같은 집 갔어?"

"어. 어제 다른 친구랑 마라탕 먹었다고 했는데도 이 친구가 마라탕이 먹고 싶다고 해서 또 갔어."


우리 집에서는 한 달에 한번 라면을 먹을까 말까 한다. 둘째는 알레르기 때문에 못 먹지만 첫째도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매워서 싫어하고, 라면 하나를 다 먹으려 하면 속이 안 좋아진다고 했다. 학교 급식으로 나온 국도 뭔가 조미료 맛이 나서 싫다는 딸. 그런 딸이 친구와 이틀 연속 마라탕을 먹으러 다녀왔다는 말에 나머지 가족은 놀라서 티를 안 내려했음에도 서로를 쳐다보게 됐다.


나도 강한 매운맛을 좋아하지 않아서 요즘 유행인 마라탕은 시도조차 않았기에 궁금증을 가지고 딸에게 마라탕집 가면 어떻게 먹는지 물었다. 딸은 맵기 전혀 없는 베이비 단계를 선택하고 먹고 싶은 재료만 골라서 주문한다고 했다. 그렇지 매운 거 못 먹으니까. 그런데 매움은 그렇다 치더라도, 친구의 요청으로 이틀 연속 같은 식당에 다녀왔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중1 딸은 어려서부터 집에서 같은 메뉴를 연속해서 주면 싫어하고, 좋은 곳도 연속해서 가면 또 가냐며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좋고 싫음이 분명한 아이라서 놀라움이 더 컸다. 호불호가 명확하여 자신의 주장을 내게 잘 표현하지만 내심 유연성도 필요하겠다 싶어서 어릴 때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유연성'이 나오면 나름 힘주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사춘기에 접어들더니 여전히 엄마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유연성을, 중요한 친구 관계에서는 너무도 잘 발휘하고 있었구나. 엄마랑 잘 형성된 애착은 이제 옛날 일이고, 친구들과의 애착형성을 위해 호감을 얻고 분위기를 따라가려고 먹는 것도 노력하고 있었구나. (엄마에게는 그런 유연성 발휘하지 않아서 몰랐잖아.)


청소년을 키우는 인간 부모에게 이러한 또래 압력은 답답하고 짜증이 날 수 있다. 특히 거의 15년 가까이 신중하게 식습관을 가르쳤다면 더욱 그렇다. 식습관을 둘러싼 문제가 청소년의 반항심을 경고하는 신호일 수도 있다. 몸에 좋은 음식을 버리거나 가족과의 저녁 식사를 거부하는 등의 행동은 10대가 부모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하는 대표적 반항이다. (...)

햄버거 가게나 커피숍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감자튀김이나 설탕을 넣은 밀크티를 마시는 것을 건강한 식습관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청소년 자녀의 식습관을 걱정하는 부모가 시각을 조금 바꾸면 와일드후드 본능에 충실한 자녀가 친구들과 음식을 나눠 먹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p.363 <와일드후드>


Childhood, adulthood처럼 아이와 어른의 중간 단계인 청소년 시기를 'wildhood'라 명명하고 그 시기의 동물들에게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현상과 인간 청소년이 보이는 공통점을 연구해 놓은 <와일드후드>에서도 쥐와 청소년기 식습관의 공통점을 밝혔다. 또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청소년기의 딸은 호불호 강한 자신의 모습에서 우정을 쌓기 위한 타협점을 찾아가고 있다. 마라탕 집은 가야겠고 매운 것은 힘들기에 가장 약한 단계를 택해서 친구를 사귀고 삶에 중요한 음식을 나눠 먹고 있다.



진정한 독립은 고립이 아니라 자립에서 시작한다.



나와 애착관계가 충분히 형성된 딸은 사춘기답게 집에서 고립의 방향으로 간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자신의 방을 가장 사랑하면서. 그다음 단계인 독립을 위하여 함께 할 친구들과의 사회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자신을 표현하면서도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 markusspiske, 출처 Unsplash


와일드후드를 겪고 있는 동물들은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먹잇감이 되는 동물에게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위험이고 위험을 피하기 위해 동물 집단 안에서 띄면 안 된다. 청소년기의 아이들도 비슷하다. 집단에서 튀지 않으려고 비슷하게 옷을 입고 머리를 길러서 시선을 피한다. 초등 고학년까지 올백 머리로 잔머리 한 올 나오지 않게 묶어 달라고 했던 아이는 사춘기 소녀답게 지금은 긴 생머리를 풀고 얼굴은 옆머리로 어느 정도 가려져 있다.



 "엄마! 누구나 그 시간을 건너 어른이 된다고 하잖아. 엄마도 그 시간을 지났을 거야. 생각해 봐."

식탁에 놓인 <와일드후드> 책 표지를 보며 아직은 엄마 바라기인 둘째가 종알댄다.


그래! 엄마 때는 말이다. 깻잎 머리가 유행이었어. 아침에 바쁘더라도 꼭 깻잎 머리를 가지런히 사선으로 이마에 붙여야 학교 갈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어. 지금 사진으로 보면 어찌나 촌스러운지 모르지만 말이다. 수학여행 갈 때는 좀 더 화려하게 헤어스타일을 만들었지. 친구랑 둘이 그룹 '핑클'의 머리를 하기로 약속해서, 친구는 이효리 스타일로 긴 머리를 양갈래로 깔끔하게 묶었고, 나는 성유리의 양갈래 머리에 후까시를 잔뜩 넣어 풍성하게 부풀린 후 스프레이로 쫙 고정을 시켰어.  


지금이야 엄마는 커피 없이는 못 살겠고 수유하면서도 술 보다 커피 못 마시는 것이 더 힘들었는데, 대학시절 커피숍을 다닐 때는 그게 그리 쓰고 맛이 없더라. 게다가 학생 용돈에 커피값도 비싸서 너무 아까운 거야. 그런데도 주변 친구들이 공강 시간에 가자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커피숍에서 커피와 주스를 번갈아 마시곤 했지. 그러다 회사 다닐 때는 점심 식사 후 커피가 필수인 분위기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커피가 너무 좋더라고.


둘째가 던져준 '엄마도 그 시간'이라는 말에 사춘기 때 유행을 따라 하고 쓰디쓴 커피였음에도 주변에 적응하던 내 모습을 떠올려 보니 어쩌면 딸이 나보다 낫겠다 싶어져 자기 방에서 고립 중인 모습도, 아침마다 머리를 감고 말리고 앞머리를 그루프로 말고 밥을 먹는 모습도 귀엽게 생각된 순간이다.  


간단히 말해 통제 불가능한 수준의 식습관이 아닌 이상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 자체가 아니라 청소년이 어울리는 친구다.
모든 사회적 동물은 집단 안에서 자신을 정의한다.

p.364 <와일드후드>


어울릴 친구를 찾아 무리 안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중이라 생각하니 딸이 발휘하고 있는 유연성이 이해된다. 여전히 학교 급식이 맵고 조미료 맛도 나서 많이 못 먹었다며 하교 후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로 내가 간식을 준비해 놓으면 한 끼 식사인 양 먹는 사춘기 딸. 점점 엄마가 후순위로 밀려나는 상황에서도 아직 엄마가 줄 수 있는 것은 '리필'을 외칠만한 흡족한 간식과 식사인 듯하다. 집에서 여전히 좋고 싫음을 잘 표현하는 딸, 안에서 쌓인 에너지로 밖에서 친구들과 건강하게 주고 받으며 사회성 기술을 익히고 무엇보다 그 안의 네 모습을 알아가길 바란다.


© chanphoto,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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