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쁜파크 May 14. 2024

부모와 아이, 서로 다른 궤도를 돈다

중2 첫째가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부모에게 주는 선물인 듯 어버이날 포함하여 2박 3일 수학여행을 떠났다. 여유 있게 딸의 방을 둘러보다 고작 이틀 집을 비우는데, 옷장 속 먼지, 책상과 서랍 사이 지우개 가루, 머리카락을 닦기 시작한다. 깨끗이 청소해 놓아도 딸은 깔끔해진 방과 나의 노고를 알지 못할 텐데 이미 베개와 침대커버까지 다 벗겨서 빨래할 준비도 마쳤다.




햇살 좋은 곳에 널어 둔 이불 빨래를 보니 문득 시댁 옥상이 떠오른다. 음식 알레르기뿐만 아니라 피부 가려움도 심해서 많이 긁던 둘째 때문이라도 우리가 내려갈 때면 시부모님은 자식맞이 준비로 곳곳을 청소하셨다. 우리도 고작 이틀 머무는데 이불과 거실 쿠션을 빨아서 옥상에 널어 햇볕에 소독하고, 텔레비전과 에어컨 위 먼지까지 닦았다고 하셨다.    


갓 태어난 손녀를 보기 위해 서울 우리 집에 묵고 내려가시던 날, 시부모님은 방에서 쓴 이불, 베개 커버를 모두 벗겨서 세탁기 돌리고 베란다에 널고 가셨다. 애 보느라 정신 없을 며느리 챙겨 주는 방식이었다.



수학여행 출발 아침, 딸에게 만 원짜리 세장을 건네니 딸은 좋아하면서도 멋쩍어 말한다.


"오늘 어버이날인데, 내가 준 것보다 더 많이 받네."

"맛있는 거 먹고 친구들과 즐겁게 건강히 다녀오면 돼."


순간, 어버이날이라고 우리가 보내드린 돈이 어린이날이라고 어머님이 보내 주신 돈 보다 많지 않다며 남편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어버이날 아침, 시댁에 감사 전화를 드렸다.


"어머님, 아버님! 감사해요."

"우리도 고맙다. 보내 준 돈으로 맛난 거 먹을게. 너희도 맛난 거 챙겨 먹으면서 건강하고 재미있게 보내라. 그렇게 잘 지내줘서 늘 고맙다."


내  딸이 어버이날 더 많이 받았다고 멋쩍어하는 모습이 사십 넘은 우리 부부의 모습 같고, 그저 잘 먹고 즐겁게 지내면 된다는 내 마음과 시부모님 마음이 다르지 않구나.




수학여행 중에 무엇을 먹는지, 호텔은 어떤지 딸이 사진을 보냈다.


샤브샤브 뷔페도 맛있었고, 호텔방도 좋다며.


룸메와 준비해 간 간식 셋팅 후 열심히 먹었다며.

딸이 돌아오는 날이 되자, 여행 중에 맛있게 먹었겠지만 내가 집에서 해 줄 수 있는 고유한 음식은 무얼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구운 엄마표 크럼블!!!



11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이듬해 2월, 첫 명절을 보내러 시댁에 내려가서 적잖이 놀랐다. 어머님이 우리 먹을 음식을 다 준비해 두셨다. 친정에서는 명절에  전을 부쳤는데, 경상도 시댁에서는 튀김을 종류별로 해 놓으셨다. 새우 튀김, 고구마 튀김, 쥐포 튀김, 오징어 튀김이 윤기를 내고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도토리 묵도 탱탱함을 뽐내며 그릇에 담겨 있었다. 나물은 전라도나 경상도나 공통 명절음식인 듯 다섯 가지를 해 놓으셨고, 우리 올라갈 때 줄 김치와 밑반찬도 여러 가지다.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시댁에서 눈을 뜨니 부엌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어머님이 맑은 국물의 생대구탕을 준비하고 계셨다. 바다 옆이라 한 끼는 회를 사 주시고, 저녁은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시댁에서 먹은 대구지리탕, 새우 튀김, 도토리 묵은 내가 임신 중에도 생각이 났고, 지금 생각해도 군침 도는 어머님표 음식이다.


한 번은 형님이 주방에서 튀김을 짚어 먹으며,


"우리 집은 제사도 없는데 먹을 게 참 많아요."


"부모 집이라고 천리길을 오는데, 집에 먹을 게 없으면 되나. 다 너희들 먹으라고 한 거니까 따스울 때 갖다 맛있게 먹어라~~~."


어머님이 가볍게 남기신 이 말은 그 순간부터 아직까지 내 마음에 코옥 박혀 있다. 먼 길 오는 자식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신 어머님의 마음이 수학여행 다녀오는 딸을 위해 크럼블을 구우면서 되살아났다.



집에 돌아온 딸은 이틀 동안 새벽에 잠들었다며 매우 피곤해 보였다. 내가 구운 크럼블을 먹고 곧 잠이 들었다. 그 후 일상은 다시 사춘기 소녀와의 현실이다. 여독이 안 풀려 좀비처럼 집 안을 걸어 다니는 딸을 보며 여기저기 잔소리가 나오는 내 모습에 딸이 돌아왔음이 실감 난다.


어쩌면 3일 동안 떨어져 있어서 서로 챙기고 잔소리도 없이 좋았구나.

어쩌면 서울과 경남의 실제적 거리가 나와 시부모님과의 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겠다.


© farzadme, 출처 Unsplash


각자의 궤도를 돌고 있는 부모와 자식. 달이 지구를 한 달 주기로 돌면서 한 번은 모양이 보이지 않는 삭이 되기도 하지만, 궤도를 따라가면 꼭 한 번은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이 되는 것처럼 간혹 아이의 모습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보일지라도 아이의 궤도를 침입하지 않고 바라봐 줘야겠다. 가끔 초승달처럼 보이기도 하고, 상현달처럼 보이다가 보름달로도 보이고 그러다 슈퍼문으로도 보일 아이의 다양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다른 행성보다 가깝지만 적정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그린다.  


2박 3일 딸의 수학여행이 내가 받은 부모님의 사랑을 떠오르게 하고, 다시 딸을 올바르게 사랑하도록 궤도 설정 할 힘을 준다.    

매거진의 이전글 딸의 피겨 악셀 성공이 내게 주는 위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