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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쁜파크 Oct 20. 2023

우리만의 앞치마를 제작하다

엄지작가

2022년 12월. 유난히 추웠던 주말 저녁 처음으로 모인 엄지작가. 어색한 긴장감이 싫지 않았던 분위기에서 함께 고전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브레인스토밍을 거치던 중 고전 속 식사 장면을 언급하면서 '고전과 음식'이라는 좀 더 구체적인 테마에 초점이 맞춰졌다. 


바쁜 현실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같이 먹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지만 그런 만큼 음식을 준비하는 마음과 상황에 따른 재료의 맛과 향, 색, 그리고 먹으며 나누는 이야기가 더해지며 음식이 가지는 복합적 의미는 커져 간다. 고전 속 오래전 시간에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에서도 결코 빠질 수 없는 음식을 우리가 직접 요리해가면서 글로 연결하려 한다.


테마에 맞춰 준비하는 동안 우리만의 앞치마를 맞춤 제작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요리에 큰 관심이 없는 나는 아이가 먹을 만큼의 음식을 대체로 간편하게 준비하는 편이지만, 이번 엄지작가 '고전과 음식' 프로젝트는 음식 그 자체 보다 과정이 훨씬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가족이 먹을 결과물 자체로의 음식이 아니라 함께 고전을 읽고 찾아보고 세심하게 준비하는 모든 과정과 우리가 하는 일의 비전을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었기에 그 과정에서 함께 할 앞치마가 떠올랐다.



다른 엄지 작가들의 동의를 거쳐 앞치마를 고르고, 거기에 우리만의 로고를 새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색과 디자인을 결정한 후, 온라인으로 초록색 앞치마를 주문 제작했더니 1주일 뒤 현관 앞에 택배가 도착했다. 꿈의 상자 같은 택배를 뜯어서 5장의 앞치마가 잘 도착했다고 엄지작가들께 인증한 후, 컴퓨터 자수를 알아봤다.


그 사이 무엇보다 중요한 엄지작가 로고 디자인도 함께 고민했는데, 최종 디자인은 쓸 작가의 중2 따님이 직접 해 주었다. 첫 중간고사를 준비하던 시기임에도 엄마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해 준 디자인이라니! 엄마가 아이들을 위해 준비하는 음식에 담긴 마음을 벌써 아는 듯했고, 그만큼 힘을 얻어 더 잘 만들고 싶어졌다.  



인터넷으로 여러 컴퓨터 자수 업체를 비교 검색하고, 장수가 많지 않아서 미리 전화로 문의한 후 '태양자수'로 결정했다. 처음 가 보는 길이고, 낯선 환경이라 지하철 환승부터 찾아가는 길까지 나름 긴장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폰으로 길을 확인하며 두리번두리번 걷다 보니, 다양한 간판과 대량으로 쌓인 물건들, 분주히 지나다니는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낯섬은 활기가 되었다.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열심으로 찾아갈 수 있는 그 순간이 생동감 있는 시장의 분위기와 함께 에너지로 다가왔다.


초록빛 앞치마. 여기에 우리만의 의미를 새기기 직전입니다.


자수집 안으로 들어가니 다양한 와펜, 색색이 실, 처음 본 자수 기계들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자수 기계 앞에 초록 앞치마를 놓고 로고를 보여드리며 크기, 위치, 글씨체 등 하나씩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디자이너라도 되는 것 마냥 신이 났다. 사장님께서 친절하게 알려 주시면서 소량이라 가격을 많이 싸게 해 줄 수는 없다고 하셨지만, 소량이라도 맡길 수 있음이 좋아서 '저희가 잘 되면 다음에는 더 많은 장수 맡길게요'라고 즐거운 여운을 남기고 나왔다.


짜잔!!! 

며칠 걸리지 않아 자수가 완성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기분 좋게 받아 온 앞치마를 펼쳤다.

 

왼쪽 주머니에 이름도 표기


 Presently Marilla came briskly in with some of Anne’s freshly ironed school aprons. 
(마릴라가 방금 다림질한, 학교에서 쓰는 앤의 앞치마를 들고 기분 좋게 들어왔다.)

p.225, <Anne of Green Gables> / p.249, <빨간머리 앤> 시공주니어


앞치마를 준비하는 동안 '고전과 음식'의 첫 책은 <빨간머리 앤>으로 결정되어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내용이 새롭게 들어왔다. 앤의 학교 앞치마를 다림질해서 2층 방으로 들고 올라가는 이 문장에서 마릴라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듯 했다.



햇볕 쨍쨍한 날 앞치마를 세탁했다. 베란다에 걸어 놓은 모습이, 빛깔은 말려 놓은 미역 같고, 모양은 거꾸로 걸어 놓은 오징어 같기도 했다. 마릴라처럼 다림질까지는 못하더라도, 구김이 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빨랫줄에 걸린 앞치마를 양손으로 팍팍 잡아당기면서 끈의 주름까지도 당겨본다. 이걸 보고 있노라니 초록 식물 위에 걸린 초록 앞치마가 빨리 입고 나가고 싶은 드레스처럼 느껴진다. 앞치마를 이리 느껴볼 줄이야.



<빨간머리 앤>에서 여학생들은 옷이 더럽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학교에서 드레스 위에 앞치마를 입었다. 그린게이블에 살면서 학교에 갔던 앤은 일종의 교복 같은 소속감을 느꼈을까? 나에게 이 앞치마는 요리를 하면서 더럽힘을 방지하는 단순한 용도가 아니다. 10년 넘게 주부로만 지내던 내게 '엄지 작가'라는 소속감을 주고, 무엇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즐거이 함께 할 수 있는 그 과정을 선물해 주는 애틋함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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