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80억 인구를 16개 유형으로 나누어 버리는 MBTI를 맹신하지는 않지만, 초등학생 시절 빨대를 나눠 쓰기 전 확인했던 혈액형이나(O형은 모두에게 피를 나눠 줄 수 있으니, 빨대도 혈액형 관계없이 나눠 써도 된다는 말을 믿었던 때가 있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도 아침마다 확인하는 12달 별자리 운세보다는 수십 가지의 문항으로 이루어진 질문 끝에 유형을 도출해내는 M 네 글자가 조금 더 그럴듯하다고 느끼는 건 왜일까.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네 개의 알파벳 중 지유와 나는 단 한 가지만 정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T와 F, 흔히들 사고형 - 감정형이라 부르는 이 두 개의 알파벳 때문인지 우리는 생일을 대하는 태도가 정반대인데 (물론 이거 하나 때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T 사고형 74%로 이루어진 나에게 생일이란 365일 중 하루일 뿐이며 이날을 굳이 한 달 전부터, 일주일 전부터 기대하고 챙긴다는 것은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데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서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생일 축하를 위해 만나자고 제안하는 것도 귀찮고, (정확히는 낯간지럽고)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기가 빨리는 타입이라 '생일 파티'에 대한 로망이 크게 없는 편이다. 하지만 지유와 함께 산 이후로 나의 생일은 '요란' 그 자체였다.
지유와 살기 시작한 지 반년쯤 지났을 무렵 찾아온 나의 생일에, 지금과 비교하면 소박한 생일 밥상을 그녀가 차려주었는데 나는 그 식탁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자고로 '미역국'이라 함은 가정집에서만 끓이는 국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유는 그럴듯한 미역국을 끓여낸 것이었다. 물론, 미역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겠지만. 그 후로도 몇 번이고 지유는 나의 생일마다 축하 한상을 차려놓는 우렁각시가 되었다. 그에 비해 요리에 큰 관심도, 재능도 없던 나는 그녀의 생일에 '좋은 선물'을 챙겨주는 것으로 고마움을 그리고 축하를 표현했다.
신촌에서의 '월세' 생활의 막이 내리고 '전세'로 눈을 돌렸을 때, 우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넓은 집에서의 생활이 가능해졌고 이는 곧 친구들이 자고 갈 공간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덕분에 소소했던 나의 생일 밥상은 지유의 숨겨두었던 요리 실력을, 꿈의 무대 펼치는 좋은 핑계가 돼주었다.
미역국이 전부였던 1인 생일상과 달리 4인용 생일 파티 요리에는 구성이 근본 없었는데, 미역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 한건 떡볶이와 만두, 치킨, 고구마튀김으로 이루어진 분식 축하상이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먹고 싶었던 메뉴 같았지만, 차림을 받는 입장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물론, 나는 내 생일을 챙겨달라고 한 적도 없다만. 하하하.
그다음 해는 파스타로 이루어진 생일상이 펼쳐져있었고, 이후로는 재료뿐 아니라 그에 걸맞은 그릇과 도구를 구매하기 시작한 지유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365일 중 하루를 위해 이 많은 걸 구매하는 것은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라 생각한 나는, 알딸딸한 기운을 빌려 의견을 이야기했고 지유는 기다렸다는 듯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친구들의 모든 생일을 '우리 집'에서 축하하기 시작했다.
생일이라고 출근을 안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거기에 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았던 나의 생일을 축하해 주겠다고, 어쩌면 지유의 음식 맛을 보러 반 강제적으로 '우리 집'에 모인 친구들은 때때로 음식을 앞에 두고 고사를 지내야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왜 내가 원치도 않은 상황으로 이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지만 이러한 모난 생각을 그녀에게 말한다고 해서, 나의 생일을 이용하지 않을 지유가 아니었다. 나 또한 괜히 상처 주는 말을, 굳이 할 생각도 없지만.
곤혹스러운 상황은 요리를 먹을 때도 일어나는데, 한껏 기대에 부푼 눈으로 '맛이 어때?'라고 묻는 지유의 질문에 매번 '맛있다!'는 한마디로 정리해 버리기에는 수고스러움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또는 이 맛을 내는 요리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먹방 프로그램 출연자에 빙의해 지유에게 건네는 것으로 맛 표현을 대체하곤 했다. 물론 지유의 음식은 대부분 매우 몹시 JONNA 맛있다.
지유는 생일에 그치지 않고 브라이덜 샤워, 취업 축하, 크리스마스, 연말 파티 등 집에서 할 수 있는 파티의 핑계들을 찾아 친구들을 초대했고, 그에 걸맞은 요리를 하기 위해 늦으면 전날부터 빠르면 일주일부터 재료 손질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바탕 요리를 하고 나면 나오는 설거지는 자연스럽게 나의 몫이 되었고, 음식의 맛을 본 나는 그 순리를 거스를 생각이 전혀 없다. 그 정도쯤이야 매년 생일 밥상을 차려주는 룸메이트를 가진, 요리를 사랑하는 하우스메이트와 함께 사는 동거인이 가져야 할 필수 덕목이 아닐까. 이번 생일에 그녀는 또 어떤 메뉴를 가져올지. 나는 어떤 맛 표현으로 F인 지유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열심히 먹방을 봐야 할 듯하다. 음 배고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