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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time Jun 26. 2023

자취가 독립이 된 순간

이사하는 날에도 출근하는 민폐 룸메가 나!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울에서 네 번째 집은 용산구로, 요즘이야 대통령 집무실이네 어쩌네 하며 요란한 동네가 되었지만 내가 아는 '용산'은 전쟁기념관이 있고, 남산타워가 높게 솟아 있는 지역이라는 점뿐이었다. 연고는 전혀 없지만 발품을 팔다 보니 교통도 편하고, 집 근처에 산책로도 있다는 것들이 가산점을 받아 둥지를 틀게 되었다.

산책 길 있는 게 진짜 크다


나에게 이사 날은 이상하게도 매번 일이 몰아쳤는데, 이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새로 들어간 프로그램에서의 첫 녹화날이자, 출연자들과의 첫 만남이 있는 날이었다. 결국 나는 오롯이 이사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고 집과 녹화장을 오가는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나의 상황을 미리 알고 있던 선후배들은 걱정 말라하였지만, 찜찜한 구석을 버릴 수 없었던 나는 새 집에 짐이 들어가는 것만 보고 녹화장으로 향했다. 만약 지금이었다면 이사가 마무리되기 전까지 절대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한창 일에 대한 열정이 흘러넘치던 시기였다. 내 아니면 절대 안 돼!라는 생각을 하고 살았으니.

 

지금 우리집이 아닌데.. 어디냐?

"당근에 세탁기 내놓으면, 팔리려나?"

"오 정말 귀찮은 생각인데!?"


딱히 개인 짐이 늘어난 건 아니었지만, 공용 용품인 냉장고, 운동기구(?), 이동식 옷걸이, 식탁 등을 옮기기 위해서는 용달차 없이 불가능했다. 더욱이 지유의 홈파티로 늘어난 조리기구, 그릇들의 안전을 위해서 포장이사를 부르는 것이 이득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얼마 전 사무실 이전을 한 아빠의 도움으로, 덤탱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이삿짐센터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새로 들어갈 집에는 세탁기와 에어컨이 빌트인으로 놓여있었기에, 세탁기는 당근으로 에어컨은 지유의 어머님께 드리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대망의 이삿날 나는 부모님과 지유에게 내 짐을 맡겨두고 출근을 하였고, 중간중간 이사 상황을 공유받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보증금을 무사히 돌려받고 새로운 보금자리에 계약금을 입금한 뒤, 입주 청소가 끝날쯤 '중간 퇴근'을 하였다. 일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 집으로 왔던 터라 예민함이 하늘을 찔렀던 나는 나의 부모님과 지유의 가족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제안에도 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집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나의 예민미를 알고 있는 지유는 양측 가족들을 데리고 해장국 집으로 향했고, 나는 새로운 공간에서 멍을 때리며 앉아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지유 방에 자리 배치를 물어오는 이삿짐센터 사장님의 질문에 나는 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옷걸이 왼쪽 벽으로 놓는다고 했지?"

"벌써 짐 옮겨!? 나 금방 갈게!"

이때까지만 해도 여름 될 때 겨울 옷은 본가에 둠

 



"집 정리는 내일 하자! 나 다시 출근한다!"


짐들이 다 들어왔을 때쯤, 나는 또다시 출근 준비를 했다. 되돌아보면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지유는 불평 한마디 없이 나를 이해해 주었고, 부모님은 나를 일터까지 데려다주셨다. 내가 없는 사이 녹화는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고,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지만, 그날 그곳에 나의 난자리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이 세상을 뒤흔들고 싶은 꿈도 없으면서, 굳이 자책하지 말자는 생각 덕에 자괴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시 작은 방을 사용하게 된 나는 그 아늑함에 '오히려 좋아'를 외쳤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필요 없는 가구는 굳이 들이지 말자가 나의 신조였는데, 그것은 내가 언젠가-언제든지 본가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전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취가 독립으로 자연스레 변해버렸고, 본가에서 내가 족히 20년은 사용했던 내방이 엄마의 취미 공간으로 바뀐 지금, 그곳에 더 이상 나의 공간은 없었다. (실제로 본가에 오래 있으면 눈치가 보인다)


때문에 나는 그럴듯한 옷장을 하나 사고 싶었고, 푹신한 매트리스와 침대도 마련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 난리 난리 물난리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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