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통한 자기 탐구 - by 롤라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의 면면에는 자기만의 관점과 가치가 반영되기 마련이죠. 이글에서는 제가 느낀 일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통해 저라는 사람을 탐구해 보았습니다.
내게 희열을 주는 상위 기획
서비스 기획자로 일을 하면서 언제가 가장 즐겁냐 묻는다면 단연 초기 서비스의 ‘상위 기획’을 할 때입니다. 상위 기획의 개념에 생소하신 분들을 위해 설명을 드리자면, 아예 없던 서비스를 0 to 1으로 아주 초기부터 기획하는 것을 보통 상위 기획이라 칭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주로 PMF(Product Market Fit)를 찾기 위해 시장, 유저 리서치를 하고 새로운 서비스 화면까지 구상을 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기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단계, 시장 & 타깃 분석
서비스 기획도 여느 기획과 마찬가지로 문제 & 해결의 분석이 필요합니다. 첫 단계에 해당하는 문제 정의 및 인사이트를 뽑는 것이 시장, 유저 분석이죠. 먼저 해당 분야의 시장을 조사해 봅니다. 시장의 크기가 어떤지, 유사 서비스는 어느 정도의 퍼포먼스를 내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죠. 이 과정에서는 새로운 서비스의 세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데스크 리서치를 어느정도 하고 나면 이를 기반으로 직접 설문이나 인터뷰를 진행을 하는데요, FGI와 같은 그룹 인터뷰나 사용성 조사를 통해 유저 의견을 듣습니다. 주로 해당 서비스에 대한 니즈가 어떻고, 기존 서비스에서의 페인포인트가 어떤지, 이걸 해결할 새로운 대안에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 이 새로운 서비스를 어떻게 사용할 것으로 예상되는지 확인합니다.
인턴 시절에도 종종 이런 유저 리서치를 했는데요, 유저들마다 서비스를 이용하는 방식이 저의 생각과 완전히 다를 때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제 방식으로만 서비스를 이용하지만 유저들은 같은 서비스라도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더군요. 특히 저와 특성이 매우 다른 타깃들을 분석할 때, 새로운 관점을 깨닫게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시니어 분들이 타깃이었을 때는 앱을 사용하는 어르신들의 관점에서 스와이프가 얼마나 어색한 동작인지를 알게 되어 꽤나 충격이었고, 10대들만의 SNS 커뮤니티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골똘히 고민했던 시간들도 있었죠.
어찌 되었든 첫 번째 리서치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유저들의 정성적인 의견을 종합하여 하나의 패턴, 즉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일입니다. 결국 유저의 니즈는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 마치 추리게임처럼 호기심을 자극하고, 다양한 보이스 속에서 하나의 줄기를 찾아가는 고민이 제겐 참 재밌습니다.
다음 단계, 서비스 기획서 작성
서비스 기획에서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문제 해결은 신규 기능을 기획하며 달성됩니다. 유저가 갖고 있는 문제를 서비스 차원에서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답변이 바로 서비스 기획서인 것이죠. 기획서에는 유저가 이러이러한 페인포인트를 느끼고 있으니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하여 유저 니즈를 충족하자는 설득이 담겨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만의 해결책인 신규 서비스를 구상합니다.
실제로 화면을 하나하나 그리는데요, 이때 서비스의 흐름과 윤곽을 잡아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없던 기능이 내 발상에서 시작해 세상에 나온다는 쾌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면 제가 서비스 기획자를 꿈꾸며 상상했던 저의 모습을 실현한 느낌이 듭니다. 내가 제안한 서비스를 수많은 유저들이 사용하고, 이를 통해 도움을 얻는다니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요!
나에겐 사회적 자기 효능감이 중요하다
이 플랫폼에서 유저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적극적으로 정의하고 그걸 제 방식으로 정리하며 해결하는 것은 고통스럽긴 하지만 재밌는 놀이 같습니다. (마치 어려운 퍼즐을 풀어내는 느낌이랄까요) 제 나름의 문제 분석과 해결 과정을 거쳐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서비스를 출시될 때 희열을 느낍니다.
결국 저는 1) 나만의 분석과 해결책으로 2)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과정에서는 주도적인 사고가, 결과에서는 선한 영향력이 중요한 것이죠. 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사회적 자기 효능감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정리되겠네요.
자신이 일에서 얻고자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 이를 가장 잘 충족할 수 있는 일을 좇는 것이 기나긴 커리어 여정의 키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직무는 내가 하는 일의 형태일 뿐이고, 회사와 산업군은 내가 일을 하는 환경일 뿐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도 중요하지만 결국 본질은 ‘내가 일을 통해 얻고자 하는 가치’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제가 IT회사의 PM으로 일하는 것은 ‘내가 현단계에서 사회적 자기 효능감을 충족하기에 가장 적합한 일이 무엇일까’에 대한 현재의 제 답변인 셈이죠.
제한적인 업무 스콥에 좌절한 이유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자기 효능감이 중요한 저는 회사에서 주도성을 충족할 수 없을 때 비교적 큰 무기력을 느끼고, 스스로 납득되지 않는 기획을 해야 할 때 회의를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입 시절 제한적인 업무 분장은 제가 회사에서 가장 답답함을 느낀 부분이죠. 제가 꿈꾼 서비스 기획은 새로운 기능을 끊임없이 구상하고 출시하는, 앞서 말한 상위 기획을 하는 것인데 막상 회사에서는 여러 경쟁사 리서치나 서비스 운영 및 픽스를 담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순간마다 회사 생활이 불만스럽고 스스로의 성장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곤 했습니다.
사실 신입 기획자에게 대단한 프로젝트들을 맡길 수 없다는 건 너무 당연하죠. 그런데 저는 창업팀, 스타트업과 같이 비교적 규모가 작은 곳에서 처음으로 업무 경험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워낙 인원 자체도 적고 시니어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인턴이었던 제가 여러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현재 제가 몸담은 기업과 같이 규모가 큰 기업에는 그런 일이 드물기에 더욱 좌절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대기업은 기존에 제공하는 서비스가 많고 그에 따라 갖춰진 시스템들이 매우 복잡합니다. 자연스럽게 업무 하나에 적응하기 위해 시간이 소요되기에 한 사람이 하나의 파트를 담당하며 전문화되기를 기대하는 측면이 있고 그만큼 인원을 세분화하여 배치하죠. 그렇기 때문에 업무 파악이 능숙하게 되어있는 시니어가 아니라면 한 사람이 넓은 단위의 프로덕트를 담당하는 일은 드물고, 신입의 경우 더더욱 그런 것이 현실입니다.
호기롭던 신입의 자기 객관화, 그리고 찾아온 겸손
이렇게 제한적인 업무 스콥에 불만을 가지다가 최근에 이게 그저 제 욕심임을 깨달은 일이 있었는데요, 제가 계속 운영하던 프로덕트의 발전 과제를 처음 오신 선배님께서 맡게 되신 일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꾸준히 맡아온 프로덕트였고, 그만큼 이 프로덕트의 발전에 대한 갈증도 많았기 때문에 제가 하고 싶은 마음이 컸고, 그만큼 이런 프로젝트에 대한 배정에 대한 불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프로젝트가 시작하고 나서보니 든 생각은 ‘나는 절대 저 프로젝트를 못했겠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프로젝트는 신속한 릴리즈를 목표로 매우 빠르게 업무를 진행하기 때문에 모르는 것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하는 프로젝트가 아니었습니다. 선배님께서 빠른 속도로 업무 진행을 이해하고 프로젝트를 이끌어나가시는 모습을 보며 저의 실력에 대한 객관화가 되기 시작했죠.
제가 아무리 선배들보다 욕심이 많고 열정이 있어도 절대적으로 실력 차이가 발생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보다 몇 년을 더 이 일을 해온 선배님들인데, 차이가 없을 수 없죠. 제가 열흘 걸려 하는 일을 선배님을 하루 만에 하실 수 있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요. 저는 그때 제가 업무 스콥에 대해 가진 불만이 어쩌면 무지함에서 비롯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객관화가 되지 않는 무지함이랄까요.
누구나 처음부터 멋있는 걸 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정말 드물죠. 그래서 신입 때 하는 일이 어쩔 때는 참 재미없고 지루한데요, 이제는 이 지난한 과정에서 내공을 쌓으면서 성장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드니 조금씩 겸손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의 크기가 어떤지 고민하기보다 ‘이 일 하나도 열심히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임하면 ‘작은 일’이라는 건 없다는 걸 느낍니다. 일에 대한 욕심도 좋지만 그 못지않게 자기 파악과 겸손도 꼭 필요한 미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요즘입니다.
- Editor_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