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에 가면 각기 다른 삶을 살던 분들의 무덤이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미 그들은 아픔도 속상함도 원통함과 같은 마음과 감정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때로는 아픔과 속상함, 그리고 원통함과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마음과 감정을 일컬어 ‘상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상처’를 잘 극복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성숙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상처’를 통해 몸과 마음이 상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가져오고, 어떻게 그러한 ‘상처’를 잘 극복할 수 있는가?
단순한 언어의 기술이나 방법론 보다 ‘나는 왜 상처를 잘 받고 잘 극복을 못할까?’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언제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는가?
대부분의 마음의 상처는 가깝고 친밀하며 신뢰하던 관계가 깨어질 때 상처를 입게 된다.
이러한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결국 어떤 과정 가운데 주고받은 ‘말’에 대한 감정이 큰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살면서 부모에게 자주 혼이 나고, 또 선생님이나 상사에게 혼이 나기도 한다.
누군가 나에게 혼을 낸다는 것은 사실 나에 대한 관계와 기대가 있기 때문에 혼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한 부모, 선생님, 상사의 혼에 대한 내 마음의 반응을 통해 상처를 받거나 상처가 남는다. 비슷하거나 같은 강도의 혼이 나거나 비난을 당해도 상처를 쉽게 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가장 큰 차이는 그 사람의 자존감과 자아 정체성이다.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말’에 의해 상처를 쉽게 받고 관계도 잘 깨어진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상대방의 말이 나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맞대응하기가 쉽다.
그러한 맞대응은 결국 예기치 않은 감정싸움을 일으키고, 결국 관계의 파국에 이르기 쉽다.
또한 자아가 건강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결국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난 역시 안돼.’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하고 거기에서 잘 헤어 나오지 못한다.
반면 자아 정체성이 분명하고 자존감이 건강한 사람은 말에 쉽게 상처받거나 오래 품지 않는다.
사실 부모, 선생님, 상사가 나를 혼내거나 쓴소리를 하는 것은 미워하거나 관계 단절의 의도가 아니다.
아무리 자존감이 높은 사람도 혼이 나거나 비난을 당하면 일시적으로 기분이 나쁘고 속이 상하다.
그러나 건강한 자아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그런 말을 들을 때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의 기회로 삼는다.
나를 먼저 돌아보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은 쉽게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고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만일 정말로 나를 공격하거나 나를 이용하려고 하는 대상과의 관계는 빨리 정리되는 것이 유익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직장 동료나 상사와의 관계가 정리되는 과정에서도 자아가 건강한 사람은 상처로 인해 주저앉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다음 단계의 새로운 관계로 쉽게 나아간다.
서두에도 말했듯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때문에 모든 관계를 회피하거나 도피하는 사람이 아닌 그것을 새로운 성숙의 기회로 삼는 자아가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극복’이란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이기어 도로 회복함. 또는 본디의 형편으로 돌아감.’이다.
그런데 우리가 상처를 극복한다는 것은 원래의 친밀함과 신뢰의 관계를 회복할 수도 있지만, 이혼이나 이직과 같이 이전의 관계가 아닌 새로운 일이나 관계를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원래의 관계를 서로 더 이상 상처 주지 않는 성숙한 관계로 회복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어떻게 상처를 잘 극복할 것인가?
사실 결혼 생활이든, 직장 생활이든 내 삶의 대부분이 있었던 것을 아무 상처 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는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내가 해야 할 새로운 일이나 비전에 집중하는 것이다.
물론 이혼이나 사별의 경우는 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하지만 실직이나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체를 떠나는 상황에서 그들이 했던 말이나 감정들에 계속 매여있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건강하지도 못하다.
사실 우리의 직장이나 삶의 터전이 내 비전의 성취와 실현의 장이 아닌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힘겨워하고 그곳에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며 결국 그 자리를 떠나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 상황에서 단지 또 생계를 위해 직장을 구하고 일자리를 구하다 보면 상처는 쓴 뿌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간에 내가 정말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일을 발견하고 준비하는 사람은 이전에 매이지 않는다.
비전은 내 안에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미래에 대한 설계도와 같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이전의 상황이나 말에 얽매여 비난하거나 자신의 삶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또한 비전을 가진 사람은 현실이 실패처럼 여겨져도 쉽게 패배주의에 빠져 주저앉아 있지 않는다.
사실 인간관계에서 일방적으로 나만 상처를 받는 경우는 드물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나에 대한 실망이나 나의 말로 상처를 받게 된다.
그래서 자아가 건강하고 비전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내가 받은 상처에 집중하거나 매이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아서도 안되지만 우리도 상처 주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
결국 상처를 잘 극복한 사람은 남에게 쉽게 상처도 주지 않는 성숙한 사람이 된다.
어디에서 어떤 사람과 함께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더라도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안 주겠지.’라고 할 필요가 없다.
먼저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말이든 관계에서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이 되려는 마음이 먼저이다.
그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먼저 마음을 열고, 먼저 섬기고, 먼저 다가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이렇게 서로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신뢰를 쌓아가는 사람이 상처를 극복한 성숙한 사람이다.
아예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무덤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라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국 살 맛나게 하는 사람이다.
서로 상처와 그로 인한 고통의 시대에 내가 먼저 살 맛나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